<시민자치 시리즈>

  청와대 국민청원이 인기다. 단순한 클릭 하나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일정 수치의 공감수에 달하면 청와대 및 정부 관계자가 직접 답변을 해줘 시민들의 참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높은 효능감을 제공해서다.    

  우리는 기존 정치제도에서 별다른 효능감을 느끼지 못한다. 내 의견을 표출할 창구도 이를 들어줄 사람도 없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이벤트’에 불과해 실질적으로 내 삶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말 내 삶을 변화시키는 정치는 없는 것일까?   

▶ ❶ 일본의 시민자치 사례

     ② 우리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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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하치오지시 의회 마에다 요시코 의원이 정책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실태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바꾸는 모습을 이웃 나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정당인 ‘도쿄생활자네트워크’를 보면, 실제로 시민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의회와 지방자치단체에 직접 전달하여 관련 정책으로 현실화한다.

정치는 시민들의 것 

지난 8월 19일, 일본 도쿄 하치오지시(市) 이쵸 홀에 시민 7명이 모였다. 보육원·학동(学童)의 급식문제를 얘기하는 ‘정책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지방의원에게 직접 피력할 수 있다. 자녀들과 함께 참석한 사토 미호(佐藤 美保, 37) 씨는 “아이들이 보육원과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자연스레 급식문제에 관심이 가서 왔다”라며 “개인적으로 시청에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정책 세미나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정책 세미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열리는 공청회와 성격이 달랐다. 지난 5월부터 시민들의 요구로 급식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만들고 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의원이 시민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됐다. 우리나라처럼 정치인이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들고 답변하는 식이 아니라, 여기서는 의원도 일반 시민과 다름없기에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의견을 경청했다.

이날엔 시민들이 의원들과 직접 보육원·학동의 급식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우리나라에선 의원과 행정 공무원들이 실태를 조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곳에는 시민들이 조사활동에 동참한다. 이번에도 시민들이 직접 앙케이트 질문지를 꾸려 하치오지시 내 모든 보육원과 학동들에 물어본 것이다. 

조사 결과, 하치오지시 내 보육원과 학동의 급식 식재료와 간식, 비누 사용 기준이 미비하거나 제각기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급식 담당자가 빈번히 바뀌어 급식의 질이 달라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참석한 시민들은 아이들의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일정한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학동 교사 사토 노부(佐藤 展, 56) 씨는 “아이들의 건강을 고려하여 급식뿐 아니라 비누, 쓰레기와 관련된 기준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도쿄생활자네트워크(지역구 하치오지시)의 정책안과 의회질문이 꾸려진다. 시민들과 지방의원들 간의 소통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하치오지시의회 나루미 유리(鳴海 有理) 의원은 “정치를 의원에 맡기지 않고 시민들이 직접 참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며 “세미나에서 시민들과 함께 한 내용을 의회에 전달할 수 있어 좋다”라고 말했다.

우리를 대표할 대리인, 의원

‘삶의 방식을 바꾸자’. 이 슬로건을 내걸고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1977년에 출범했다. 당시 주부로 대부분 구성된 생활협동조합이 합성세재 사용반대를 촉구하고 식품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났지만, 중앙정당으로 구성된 의회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남성 의원 중심의 의회였다 보니 일상생활과 밀접한 환경 문제 등이 정책으로 제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앙정당에 대한 불신이 커져가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대신 말해줄 수 있는 대리인을 필요로 했다. 시민을 대변하는 후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신 정책결정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대리인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 타케우치 요시에(武内 好恵) 사무국장은 “의회에서 요구사항을 거절하다 보니 더는 중앙정당에 의회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며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잘 들어주도록 의회를 바꾸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에서 의원은 직업이 아니다. 의원으로서 받는 급여에서 활동비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네트워크에 모두 기부한다. 또한 이들의 임기는 최대 3선(12년)으로 제한된다. 누구나 돌아가면서 의원을 할 수 있고, 의원에게만 부여되는 특권화를 막기 위해서다. 임기를 끝마쳤다고 해서 의원 출신 시민들은 정치 활동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전문성을 살려 끊임없이 시민으로서 지역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들에게 의원이라는 직책은 단지 시민대표이며, 그 이상은 없었다.

지금까지 도쿄생활자네트워크에서 나온 의원(구, 시, 도 포함) 수는 총 210명이며, 이중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의원 수는 51명이다. 도쿄뿐 아니라 후쿠오카, 나가노 등 일본 각지에서도 시민정치 네트워크가 운영되고 있는데, 전국 의원 수는 총 108명이다.

정책세미나에 자녀와 함께 참석한 시민이 실태조사 결과지를 꼼꼼히 확인한다

우리 지역, 우리가 바꾼다

시민들이 스스로 지역의제를 정하여 자신들을 대표하는 의원에게 전달한다. ‘보도 폭을 넓혀 달라’, ‘어린이 식당이 필요하다’, ‘재취업하려 하나 나이제한이 있다’ 등 시민들은 언제 어디서나 일상 속에서 겪는 불편함을 말할 수 있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이를 ‘한마디 제안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모아진 ‘한마디’들로부터 조사활동이 시작된다.

특히 지역문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함께 하는 일이 많다. 일례로 도쿄 고마에시 노가와 강(江)의 수질조사를 시민들이 주도로 진행했다. 또한 도쿄 내 빈집현황을 조사한 다음 교토시에 빈집 활용방안을 시민들과 직접 시찰하러 간 적도 있었다. 타케우치 요시에 사무국장은 “이런 활동을 같이 한 시민들이 나중에 네트워크 소속으로 활동하거나 의원이 되는 경우가 있어 시민들의 참여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집계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 세미나, 워크숍에서 시민들과 의원들이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관련 의제들을 현실화하고자 지방정부 및 행정공무원과 토론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리를 ‘시민과행정협의회’라 일컫는다. 네트워크 소속 의원들만이 문제 해결을 촉구하거나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청원을 하는 등의 일방적인 창구가 아니라, 실제 정책 담당자와 함께하는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곳부터 바꿔보자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네트워크의 활동 영역은 점점 넓어졌다. 초기에는 먹거리와 쓰레기 문제 등 주로 생활정치를 실현했다. 생활협동조합의 구성원인 주부들로부터 대리인 운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역문제로 확장해나갔다. 현재는 원전 문제를 비롯하여 여성문제, 도시계획 등에 대한 안건도 시민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자신들의 지역을 바꾸려는 시민들의 노력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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