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조는 성이 ‘왕’입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고, 그 후손들이 통치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고려의 왕 중에는 ‘왕’ 씨가 아닌 □씨로 기록된 왕이 있다고 합니다.  □는 어떤 성일까요?

□는 바로 ‘신’입니다. <고려사>에는 고려 제32대 왕인 우왕과 그의 아들이자 제33대 왕, 창왕을 신 씨로 기록 하고 있습니다. 우왕과 창왕은 왜 신 씨로 기록된 걸까요? 정말 그들은 다른 혈통의 사람들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쇠락하던 고려의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우왕의 아버지인 공민왕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아들 ‘우’에게 왕좌를 물려주는데 신분의 장벽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우는 어머니가 승려 신돈의 노비 ‘반야’였기에 왕위를 물려받기에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당시 조정은 이를 염려해 우가 궁녀의 아들이라고 포고했지만, 거짓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죠. 우왕에겐 자신의 출신이 항상 걸림돌이었습니다. 결국 우왕의 지지 세력이던 신하 이인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야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우는 이러한 논란에도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왕이 됩니다. 그러나 곧 이인임과 이성계의 세력 다툼이 있었고, 이성계가 승리해 우왕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죠. 결국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끝에 우왕은 폐위됩니다. 이어 우왕의 아들 ‘창’이 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몇 개월 만에 폐위됩니다. 이성계의 권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죠.

이후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기존 왕조의 전통성을 부정해야 했던 것이죠. 이성계는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내세웁니다. 신돈의 노비 반야에게서 태어난 우왕이 사실은 ‘신돈’의 아들이니, 가짜 왕을 폐위한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였죠. 우왕의 신분적 한계는 결국 *역성혁명의 원인으로 이용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우왕과 창왕은 묘호도 받지 못한 채 조선 건국 세력이 집필한 <고려사>에 신 씨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학계는 우왕과 창왕을 왕 씨로 보고 있습니다. 공민왕이 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창왕의 즉위 당시에는 혈통 논란이 없었던 점 등 다양한 근거가 있습니다. 특히 두 왕을 신 씨로 전하고 있는 사료가 <고려사>라는 점도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김기섭(사학) 교수는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지만, 조선 건국세력이 정권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집필했다”라며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고려 왕조를 계승한 두 왕을 ‘왕’씨로 보는 해석이 합리적”이라고 전했습니다.

*역성혁명 : 다른 성(姓)에 의한 왕조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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