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 없는 맨 가슴을 꿈꾼다’, ‘너만 까냐? 나도 깐다’. 지난 6월 2일 오후 1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페이스북 코리아 사옥 앞에서 여성 10명이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등과 배에는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한 음절씩 쓰여 있었다. 이들은 2016년 5월 17일 발생한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을 향한 폭력과 여성혐오에 저항하기 위해 결성된 ‘불꽃페미액션’의 회원들이다. 

이날 퍼포먼스는 불꽃페미액션이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서 열린 ‘2018 월경 페스티벌’에 참여해 속옷과 상의를 벗은 채 찍어 올린 사진을 페이스북 코리아가 삭제 조치한 것이 발단이 됐다. 남성의 나체 사진은 음란물로 분류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나체 사진을 음란물로 보는 것은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 한다는 얘기다.

‘샤워장이나 봄철 대학캠퍼스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자들 젖가슴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략 같은 나이대의 여자들임에도 젖가슴 부피가 3배에서 5배나 차이가 난다. 몸의 다른 부분에서 그 정도로 편차가 큰 곳이 있을까? 젖가슴이 그렇게도 중요한 의사소통수단이라면 좀 더 비슷비슷해야 하는 것 아닐까?’ - 플로렌스 윌리엄스, <젖가슴> 중에서

진화론을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선택’이 ‘자연선택’보다 우선된다고 언급하면서, 성선택의 예로 ‘여성의 젖가슴’을 즐겨 언급한다.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된 엉덩이를 대신하는 기관으로 여성의 젖가슴이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요즘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페미니스트에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골반 모형으로 머리를 얻어맞을 일이다. 그들에게 여성의 젖가슴은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2012년 출간된 윌리엄스의 저서 <젖가슴>에선 ‘젖가슴은 어디까지나 직립한 인류가 수유를 최적화하기 위해 진화한 형태일 뿐’이라며 남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커진 신체기관이 아니라고 한다.

직립과 뇌용량 증가로 목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게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목을 받쳐주면서 수유해야 하는데, 이때 젖꼭지가 축 처진 가슴에 달려 있어야 아기가 젖을 빨기 쉽다는 이야기다. 또 턱이 퇴화되면서 얼굴이 평평해짐에 따라 젖가슴의 지방조직이 완충재 역할을 해준다고 덧붙였다. 연약한 뼈와 골격을 지닌 아기가 갈비뼈에 덮은 살에 붙어 있는 젖꼭지를 빨려다가 코뼈가 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기의 수유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방 조직이 있으면 되기 때문에 진화적으로 정교한 조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개인에 따라 젖가슴의 크기가 다른 신체 기관과 비교해 편차가 큰 이유다. 

남성이 여성을 선택할 때 젖가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진화론적으로는 논리적이지 않다. 실제로 개화기 서양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모습을 특이하게 생각해 촬영한 사진과 기록문이 많다. 결국 모리스의 성선택론 주장은 문화적 편견이 만들어낸 ‘판타지’다. 

여성의 몸을 관음의 대상으로만 보는 남성들의 담론은 스스로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왜냐면 여성도 똑같은 시선으로 남성의 몸을 관음의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며, 문화적 판타지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담론 속에서 남성들도 자신의 성기가 더 크고 굵어져야 자신 있게 성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 

사실 젖가슴은 인체에서 가장 늦게 성숙하는 기관이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2차성징이 일어난 것으로 신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임신을 한 뒤에야 임신 호르몬의 영향 아래 젖을 만드는 과정이 이어진다. 또 이유기가 되면 젖샘이 막힌다. 임신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도 매달 관련 세포조직이 느슨화되고 조직화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여성의 가슴을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정작 가슴 속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너무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