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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우는 디지털 공간의 지우개, 모두를 위한 ‘정보’도 지울까
  • 오시경 기자
  • 승인 2018.05.06 05:32
  • 호수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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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과 정보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온·오프라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온라인 게시물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규정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초기에는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최근 몰카 영상과 개인정보 유포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면서 ‘잊힐 권리’가 주목받고 있다. 온라인상의 기록이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나를 잊어줘

‘잊힐 권리’란 2009년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가 자신의 저서 <잊힐 권리>에서 처음 주장한 개념이다. 그는 모든 정보에 만료일을 부여해 정보가 일정기간 동안만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힐 권리의 개념은 조금씩 바뀌었다. 현재 잊힐 권리는 개인이 인터넷상에서 그들의 평판과 정체성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잊힐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한 법률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잊힐 권리에 대한 법적 판결은 사건마다 다르다. 지난 2월에는 구글이 잊힐 권리를 두고 벌어진 소송에서 패했다. 이 소송은 한 기업인이 구글을 유럽 정보보호법상 개인정보 오남용 혐의로 고소하며 시작됐다. 이 기업인은 자신의 과거 범죄 기록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검색돼 고통받고 있다며 이를 검색되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구글은 범죄 기록이 중대한 공익을 수호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영국 런던고등법원은 해당 범죄 기록이 현재 직업과는 상관없다는 이유로 기록이 검색되지 않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잊힐 권리’ 원칙에 의거해 내린 판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잊혀져야 하나, 알려져야 하나

잊힐 권리는 다른 기본권과 충돌하기도 한다. 잊힐 권리와 충돌하는 대표적인 권리에는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으로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말한다. 잊힐 권리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타인의 게시글에 대해 삭제와 검색 배제가 쉽게 이뤄진다면, 인터넷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의견 표현이 어려워진다.

잊힐 권리는 정보 수용자의 알 권리도 침해할 수 있다. 알 권리는 국민 개개인이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이다. 잊힐 권리를 내세워 개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삭제할 경우, 특히 공인에 대해다양한 견해와 공정한 평가를 막을 수 있다. 국민들은 공인에 대한 범죄행위, 성범죄자 보도 등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인호(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역사가 삭제되면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다”라며 “잊힐 권리가 강하게 적용돼 다른 권리가 침해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잊힐 권리를 요구한 소송이 기각된 경우가 있다. 2016년 일본에서 인터넷상의 아동 매춘 관련 범죄 기록을 삭제해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쿄 고등재판소는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지났어도 범죄 기록 정보의 공공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를 기각했다. 해당 판결을 내린 고등재판소는 정보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정보를 삭제했을 때 공익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 현재 <개인정보 보호법>과 <정보통신망법>으로 잊힐 권리를 보장하려 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법> 제36조는 정보 주체가 정보 처리자에게 개인정보 삭제, 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의 제37조를 통해 정보 주체는 개인정보처리자가 보유한 자신의 개인정보를 파기하는 등의 처리 정지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정보통신망법> 제44조에 따라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개된 정보로 자신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 사실을 소명하여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 권리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거나 이해 당사자 간의 싸움이 예상될 때는 ‘임시조치’를 통해 30일간 해당 정보를 임시적으로 인터넷에서 차단할 수 있다. 

강원도청은 국내 최초로 잊힐 권리에 대한 조례를 제정했다. <강원도 잊혀질 권리 확보 사업 지원 조례>는 도민의 잊힐 권리를 확보하는 시스템과 이를 위한 비용 지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강원도청은 홈페이지에 ‘디지털 소멸 시스템(Digital Aging System·DAS)’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게시글이 삭제되도록 작성자가 지정할 수 있는 기술이다. 강원도청 관계자는 “강원도민의 디지털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조례를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에서는 2016년도부터 <인터넷 자기 게시물 접근배제 요청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을 시행하고 있다. 방통위는 ‘자기 게시글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이용자를 구제하기 위해 필요 최소한의 범위에서 가이드라인을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 가이드라인은 정보 통신망을 통해 이용자 본인이 게시한 글, 사진 및 이에 준하는 기타 게시물에 대한 접근 배제 요청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고인이 생전 쓴 게시글에 대해서도 유족이나 해당 권리 위임자가 이를 요청할 수 있다. 가이드라인은 자기 게시물을 직접 삭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요청자가 탈퇴 등으로 인해 해당 게시글을 직접 삭제하기 어려운 경우, 게시판 관리자에게 접근배제 요청을 할 수 있게 규정했다. 요청자는 접근 배제 요청을 하기 위해 게시물의 위치자료(URL)와 자신이 그 게시글을 올렸다는 입증자료를 방통위에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본인 확인 과정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사진의 경우 신분증과 대조로 쉽게 증명 가능하다. 하지만 글의 경우 탈퇴 시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개인정보가 파기돼 맥락과 요청자의 정황 추론만으로 본인 확인이 이뤄진다. 

인터넷 사업자들도 이용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는 공익과 개인의 침해 정도를 판단하기 위해 △공익 또는 공적 관심사와 관련 없는 사실을 적시한 경우 △일정 기간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공론화되지 않은 사유 등 기준을 마련해 정책규정을 운영하고 있다. 정책규정을 통해 각 사업자들이 지켜야 할 게시글과 검색어에 대한 처리기준을 정함으로써 잊힐 권리와 표현의 자유 모두 적정하게 지키고자 한 것이다. 

 

잊힐 권리, 적정 기준이 필요해

잊힐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다른 권리를 최대한 침해하지 않는 선의 적정 기준이 필요하다. 주정민(전남대 신문방송학) 교수는 “알 권리와 마찬가지로 잊힐 권리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보장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오히려 적정한 잊힐 권리 보장을 통해 인터넷 소통이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잊힐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한 번의 실수라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언급돼 사람들이 인터넷상의 의견 표출이 꺼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송명빈(성균관대 신문방송학) 교수는 “잊힐 권리에 대한 적정 범위를 정한다면, 사람들이 본인의 정보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게 된다”라며 “이를 통해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공론의 장이 인터넷 환경에서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시경 기자  sunlight1105@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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