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는 지위로 진실을 왜곡하려 들곤 한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권력자는 당시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을 감추고 싶어 했다. 그 원인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불법’, ‘빨갱이’, ‘폭동’ 등 몇 가지 단어가 제주4·3의 진상을 숨기는 데 사용됐다. 무자비한 공권력에 저항한 도민들은 공산주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로 명명돼 내란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섬사람들의 분노를 폭동으로 치부해 섬 전체에 계엄령을 포고하고, 국가의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후 국가공동체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사법부는 당시 국민적 논란을 받아들여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재판을 진행했다. 대법원은 2001년에 계엄선포 전후로 제주도에 ‘양민학살’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4·3 희생자들에게 고개 숙였다. 국가 지도자가 사과한 것은 사건 발생 55년 만이었다. 이후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고, 제주4·3평화재단이 만들어져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위로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도 치열하게 그들의 두려운 과거와 마주하고 있다. 사건의 진실을 명백히 밝히길 요구하고, 숨을 거둔 이들을 추모하며 다음 세대에게 제주4·3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제주4·3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500여 명의 증언자가 참여했고, 그 수는 오늘날까지 계속 늘어나 참담한 과거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1948년과 1949년에 이뤄진 민간인 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피해자들도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당시 재판이 합당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유족회를 결성해 해마다 4·3추모제를 열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동안의 관심사는 당시 국가의 공권력이 어떻게 도민을 폭압했고 진실을 왜곡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 지였다. 이는 모두 제주4·3사건의 결과다. 사건 발생 이후 △잔혹하게 죽어간 민간인들 △국가가 덮으려 했던 사건들 △커다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생존자들. 모든 논의 대상이 사후에 맞춰져 있다. 물론 피해자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사후처리를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원인을 차치하고 결과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결론난 제주4·3은 제대로 기억될 수 없다.  

제주4·3은 ‘희생’의 역사가 아니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죽음 뒤에는 그들의 염원이 있다. 도민들은 친일파 척결과 조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 거리로 나왔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진행했다. 제주4·3이 발생하기 전까지 도민으로부터 목숨을 잃은 군인과 경찰이 없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건을 평가할 때 국가를 향했던 도민들의 요구와 그들의 자주적인 의식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주4·3이 아니다. 광복 이후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민들의 열망과 이를 꺾기 위한 국가의 과도한 진압이 함께 평가돼야 한다. 그래야만 제주4·3이 제대로 기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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