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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선희
  • 우수빈(국어교육 16)
  • 승인 2017.11.27 15:40
  • 호수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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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드디어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왔다. 친구들과 함께 유쾌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것은 예전부터 가져왔던 로망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에 화장을 하고 미리 사 뒀던 빨간색 원피스를 입었다. 선희에게서 어디냐는 연락이 와서 같이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기로 했다. 거리에는 흰 눈이 쌓여 있고 번화가로 들어갈수록 형형색색의 밝게 빛나는 트리가 보이고 즐거운 캐럴이 들려와 눈과 귀가 즐거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미리 예약해 뒀던 룸에 들어가 친구들과 함께 케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들뜬 분위기에서 선물 교환식을 시작했고 나는 정연이의, 선희는 내 선물을 갖게 되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빨간색 목도리였다. 선희는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고 바로 목도리를 둘러보는 모습이 신나 보였다. 선희의 흰 피부와 빨간 목도리는 몹시 잘 어울렸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서 밖에 나오니 느껴지는 밤공기가 차가웠다. 다들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건지 사람이 제법 붐비는 버스 정류장에서, 선희를 흘깃흘깃 바라보던 한 남자가 다가와 번호를 물었다. 둘은 번호를 주고받았고 나는 내가 준 목도리 덕분이라며 장난을 쳤다. 선희는 웃으며 빨간 목도리를 목 끝까지 올려 손에 쥐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1월 4일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나서 밖에 나가기 귀찮아 집에만 내내 있던 나를 선희가 불러냈다. 그렇게 집에만 있으면 곰이 되는 거 아니냐는 잔소리를 들었다. 퍽도 그러겠다며 내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서 만난 선희는 들떠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번호를 가져갔던 그 남자와 잘 되가는 모양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첫 연애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물론 아직 사귀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잘 될 듯 했다. 친구의 연애 사업에 건투를 빌어 주고 나서 이번 신년 목표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다. 의류학과인 선희는 직접 디자인한 옷을 만들어 보고 패션쇼에 최대한 많이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선희에게 나중에 옷 브랜드를 만들게 되면 나한테도 몇 벌 선물해 달라는 농담을 던졌다. 선희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웃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옷일 때 선희의 눈은 반짝인다. 자신만의 의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선희의 오랜 꿈이었다. 절대 불가능한 꿈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카페 창밖에서 조용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열정 있고 노력할 줄 아는 선희는 분명 잘 해낼 것이다.

 

2월 6일

전쟁 같던 수강신청을 끝낸 후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로 했던 과목을 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선방한 시간표였다. 선희와 연락해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선희는 파스타를 돌돌 말며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개강 전에 같이 제주도에 가자는 이야기였다. 제주도에는 펜션 사업을 하는 선희네 이모부가 계신다. 갑자기 잡힌 여행 일정이었지만 선희와 제주도에서 관광지와 맛집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마음이 즐거워졌다. 함께 저녁 늦도록 여행 코스를 짰다.

 

2월 20일

비행을 하고 도착한 제주는 아름다웠다. 선희는 남자친구에게 보내준다며 풍경 사진을 찍었다. 선희의 이모부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는 뉴질랜드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기온은 낮았지만 낮에 내리쬐는 따뜻한 햇빛 덕분에 추위가 그나마 덜 느껴졌다. 오늘 간 곳 중에서 나는 섭지코지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선희도 즐거워했던 곳이다. 우리는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올라가며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바다를 구경했다. 계단을 올라가 하얀 등대에 도착하니 섭지코지의 전체 풍경과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끼며 그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가자고 제안해 준 선희에게 고마운 감정이 느껴졌다. 옆에 있던 선희를 돌아보니 생각에 잠긴 듯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갈색 머리칼이 예뻤다. 나는 선희에게 여기에 오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선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었다.

 

3월 7일

선희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의 친구들과 같이 안마방을 다녀온 것을 선희에게 들켰다고 했다. 개강 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선희는 울분을 토해냈다. 정연이가 생맥주 잔을 들어 올리며 혀를 찼다. 선희는 아직 첫 남자친구와 벚꽃 구경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땅콩 안주를 집어먹으며 나는 쉴 새 없이 정절 없는 크리스마스남을 욕했다. 선희는 처연하게 내가 대신 욕을 해줘서 자기 기분이 좀 나아졌다고 말했다. 남자 복 없는 선희의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사는 놈이나 파는 년이나 똑같아, 라고 선희가 말했다. 맥주를 마신 선희는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몸 팔아 가면서 돈을 버는 더러운 것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일장 연설을 하는 선희의 말을 우리는 맞장구를 치며 들어주었다.

 

3월 23일

혼자 캠퍼스를 거닐다 의류학과 건물 앞에서 문득 선희가 이 시간대에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 생각나 걸음을 멈췄다. 전에도 종종 작업실에 찾아갔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약간 열린 작업실 문 너머로 선배와 대화 하고 있는 선희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의 졸업 패션쇼를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지한 분위기에 혹여 방해가 될까 작업실에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물끄러미 선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당히 옷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선희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옷감을 대 보며 작업에 몰두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나는 발길을 돌렸다. 저럴 때의 선희의 모습은 정말이지 멋있고 그것에 푹 빠져 있어 보여서 함부로 방해하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4월 3일

만우절에 선희에게 연락을 보냈었는데 아직까지 답장이 없다. 그렇게 큰 장난은 아니었는데 혹시 화가 났나? 평소에 서로 장난을 많이 쳐서 이번 만우절에도 그래 본건데. 내일까지 답장이 없으면 전화를 해 봐야겠다.

 

4월 8일

선희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아 선희의 집을 찾아갔다. 장난 때문에 화가 났나 하는 걱정을 넘어서서 혹시 선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 익숙한 선희의 어머니가 나오셨다. 선희가 걱정돼 안부를 묻자 별 일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우리 수빈이 왔냐고, 어서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주셨을 아주머니께선 나를 계속 현관문 앞에 세워두셨다. 아주머니는 집 안의 눈치를 살피곤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셨다. 동공이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을 많이 대해본 나는 저것이 상대방이 무언가에 당황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표지임을 알았다. 아주머니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발걸음에 불안한 기운이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4월 9일

의류학과 건물을 찾아가 선희의 과 동기들을 만났다. 선희는 4월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동기들도 역시 정확한 이유나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혹시 선희가 학교에 나오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왔다.

 

4월 17일

최창식 교수님의 <취재보도론> 메모. 언론은 경쟁적인 취재나 보도 과정에서 피해자나 가족에게 심각한 2차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언론은 피해자의 피해 상태를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있어, 피해자 사생활의 비밀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4월 28일

학보사에서 나가던 중 선희의 과 동기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 조교를 통해 선희가 중도 휴학 신청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연락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5월 25일

선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2개월 만이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검정 볼캡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던 선희는 카페에 들어오는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본 선희는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태연한 척 표정을 위장하며 나는 왜 이제야 연락을 한 거냐며 선희에게 투덜댔다. 나는 무언가 일이 터질 것만 같을 때 내가 처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해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와 같거나 그보다는 나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니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 갑자기 연락이 끊겼던, 중도 휴학을 한, 현재 집에 있는 것이 확실한 선희가 처했을 가장 최악의 상황. 떨리는 손을 애써 숨기며 나는 선희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대체 너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중도 휴학까지 하고. 선희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고개를 살짝 숙인 선희는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선희는 결국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수빈아. 나.

선희는 머리로는 알겠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수도꼭지가 됐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흐르고 흘러서 강을 이룰 것만 같았다. 선희는 말했다. 내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아는데, 모두가 그렇게 말해 주고 나도 머리로는 그걸 알고 있는데. 그런데 수빈아. ㅡ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ㅡ나 자꾸 내가 더러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성폭행. 선희는 그 단어가 싫어졌다고 했다. 단순히 단어의 뜻 때문이 아니었다. 성폭행ㅡ그 세 글자 안에 선희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을 다 담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짧은 세 글자로 내가 당한 모든 상황을 표현할 수 없는데, 절대로 죽어도 다 포함할 수 없는데. 선희는 우는지 웃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어를 쓰고 그 상황을 다 표현한 것처럼 말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해.

‘그 일’을 당한 건 3월 말이었다고 했다.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집으로 가던 길. 범인은 40대 남성. 선희는 ‘그 일’이 끝난 직후 바로 원스톱센터에 가 신고를 했다고 한다. 신고 과정을 차례대로 밟던 중 선희에게는 수만 개의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이 학교와 친척들에게 알려지면 어쩌지? 괜히 신고한 걸까. 하지만 범인을 잡고 확실하게 징역을 살게 해야지. 범인이 멀쩡하게 사회에서 생활하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잖아. 그런데 징역은 얼마나 나올까? 형을 많이 받아봤자 3년이고 집행유예인 경우도 많던데. 그 사람이 형을 다 살고 나서 나에게 찾아와 보복을 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서 무서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부모님은 나에게 뭐라고 말해 주실까. 부모님이 알게 돼서 친척들에게 얘기하면 어떻게 하지? 그게 퍼져서 학교에까지 알려지면? 부모님께 남에게는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인데 왜 내 범죄 피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상상만 해도 끔찍하게 싫은 걸까. 너무 억울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내가 당한 거고 내가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이렇게 미칠 듯이 생각해야 하는 거야. 난 아무 잘못이 없어. 나도 알아. 내 잘못이 아니야. 오직 가해자의 잘못일 뿐이야. 나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속이 너무 답답해.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나는 왜 자꾸만 내가ㅡ

ㅡ내가 더러워진 것 같아. 선희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다시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과 동시에 머리가 징 울리고 눈물이 고이려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지금 이 말을 선희에게 해 줄 수가 없다. 선희도 알고 있으니까. 선희는 한 치도 자신의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선희는 알고 있지만 모른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타인이 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직 당사자 자신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미친 듯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턱 들어선 것만 같아 숨을 쉴 수 없었다.

나에게 말하기까지 선희는 수천 번도 더 고민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만은 말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말해줘야겠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너무 힘들어서. 털어 놓고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어서. 나는 선희에게 용기 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선희는 씁쓸하게 말했다. 선희의 어머니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너 수빈이한테 ‘당한 거’ 말할 거냐고, 그런 거 말해서 퍼지면 좋을 거 하나 없다고 하셨다고. 나는 절대 남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선희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선희의 미소를 보니 다시 미친 듯이 눈물이 났다. 끝없이 나오는 샘이 내 눈 안에 생긴 것만 같았다. 선희도 그런 나를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선희의 눈물은 슬펐다. 온갖 증오와 고통과 분노와 괴로움과 답답함이 그것에 담겨 있었다. 선희는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5월 26일

이야기가 길어져 자정이 지난 시각에 선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버스에 탔다. 조용한 버스 안 사람들 속에서 라디오의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나는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밤거리를 바라보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라디오에서는 시골 마을의 여교사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속이 울렁거렸다. 휴대폰을 들어 관련 기사를 찾아 검색했다. ‘섬마을 여교사 집단 윤간 사건…여자의 몸속에 남아 있던 세 남자의 정액’ 순간 기사 제목을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떠 보았다. 기사 제목은 그대로였다. 멍하니 휴대폰 창을 내려다 봤다. 피해자에게 초점이 맞춰진,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버무린 기사 제목. 기자는 이 사건을 하나의 포르노로 만들어 놓았다. 기사 댓글 창을 봤다. 자극적인 제목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다른 사람. 학부모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건 여자도 ‘할’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사람이 있었다. 기사를 계속 봤다간 정말 토할 것만 같아서 화면을 끄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밝게 빛났고 사람들은 밤을 즐기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선희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방금 본 기사의 내용이 대조적으로 느껴질 만큼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는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빠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아빠는 여자애가 조심성이 없이 일찍일찍 다니지 않는다고 나를 나무라셨다. 티비에서는 한 20대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빠는 티비 화면을 보더니 여자가 이런 새벽까지 다니는 건 저런 놈들한테 빌미를 주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티비에서 나오는 뉴스를 바라봤다. 아빠는 저럴 때 여자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아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자 잘못이 아주 없지는 않다, 여자가 늦게 다녔다는 것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대답을 들은 나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6월 12일

[부산 남부경찰서장, “여자 궁디 만지는 게 비일비재한데 경찰이 그것까지 핥아줘야 하나”]

부산 남부경찰서 김형철 서장이 성추행 신고자에 대해 막말을 일삼아 논란이 되고 있다. 성추행 피해 신고가 들어와 이에 대해 취재를 하던 중 그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데 가시나가 판촉 소주 팔려고 하다가 손님이 만졌는데 경찰이 지(자기) 엉덩이 만진 것까지 핥아 줘야 하나”라고 막말했다. “술집에 가서 ‘아이고 예쁘다’ 하면서 아가씨 궁디 함 만지면 증거가 있나요?”라고 말하며 피해 여성에 대한 2차적인 모독과 경찰서장으로서의 수준 낮은 발언을 계속했다. 장선화 부산여성연합 대표는 위와 같은 김형철 서장의 말에 “이런 발언은 경찰이 성범죄를 바라보는 수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경찰이, 그것도 경찰 책임자가 피해자에게 2차 성희롱 피해를 준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비난했다.

@김수빈 기자

학보사에서 기사를 마무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피곤한 몸을 싣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요즘도 계속 주로 집에만 있는 선희를 위해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책이 좋을까 고민하던 중 나는 앞쪽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퇴근 시간과 겹쳐 지하철에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였다. 젊은 여자와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일부러 인지 사람에 치여서 그런 건지 모르게 남자는 슬쩍슬쩍 여자에게 자신의 몸을 가져다 댔다. 여자는 작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남자는 그런 행동을 지속하다가, 한순간 대놓고 여자의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여자는 날카롭게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하철 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자는 지금 뭘 하는 거냐며 남자를 추궁했다. 당황할 것으로 예상했던 남자는 내 예상과는 달리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아가씨. 내가 돈 많아 보여?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많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꽃뱀...이라는 단어가 내 귀까지 들려왔다. 나는 일어서서 그 앞으로 갔다. 여자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당황해 얼굴이 빨개져 있는 상태였다. 남자는 시종일관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그 앞에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예 경찰서죠? 지금 지하철 1호선에서 성추행 현장 목격했는데요. 네. 남자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경찰서에서 진술을 마치고 나온 상태였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나는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멀쩡한 피해자가 꽃뱀이 되는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여자는 꼭 사례를 하고 싶다며 내 전화번호를 받아 갔다. 나는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한 마음에 생각을 끊으려 했지만 성폭행, 무고죄, 꽃뱀이라는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수많은 성폭행 사건보다 몇 안 되는 무고죄 사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피해자임에도 꽃뱀으로 내몰리는 여자들. 수많은 생각이 뒤섞여 나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더 이상 책의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6월 17일

선희가 좋아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선희를 데리고 갔다. 너 그렇게 집에만 있으면 곰 돼. 발랄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며 내가 말했다. 선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내가 경찰서에 가서 진술한 일에 대해 선희는 관심을 보였다. 선희는 ‘그 일’을 겪고 나서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가 봤다고 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사건 직후 선희의 몸에는 큰 외상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었다고 했다. 선희는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1분 1초라도 더 빨리 빠져 나오고 싶었던 것이다. 성폭행 직후 무참히 흉기에 의해 죽고 싶지 않았던 선희는 범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 주었다고 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최대한 덜 맞고 빨리 끝내고 싶어서. 경찰들은 그걸 이해 못하더라, 하고 선희가 말했다. 외상의 흔적이 없는 선희에게 경찰은 ‘충분히 저항을 하지 않았다. 강간이 아니라 합의 하에 성립된 성관계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합의?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경악스러운 경찰의 수사 태도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가해자는 선희가 웃어 주고 호응했던 것으로 보아 상대방도 충분히 행위를 즐긴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손이 떨려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경찰의 눈에는 꼭 ‘너 꽃뱀이지’ 라는 말이 써진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선희의 얼굴은 너무도 담담해서, 그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더 감정에 북받치게 했다. 오늘은 정말 선희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우리는 나온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없었다.

 

6월 30일

학교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직접 진행하는 강연이 열렸다. 강의 주제는 성폭행과 그 사후 방안,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인식이었다. 학보사 기자 신분으로 나는 강연을 들었다. 강연자는 당당하고 소신 있는 모습으로 자신 있게 강연을 이어 나갔다. 그 사람도 본인이 직접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시작하기까지 엄청난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고 또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여성들을 위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연 내용은 몹시 유익했고 여성으로서 공감 가는 내용도 많았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사람들의 2차 가해에 대한 것이었다. 무심히 피해자에게 책임을 던지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피해자들을 갉아 먹는다. 특히 성폭행 사건에서 사회는 피해자에게 수많은 2차 가해를 가하고 피해자는 그것에 몹시 큰 괴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강연의 마지막인 질문 시간이 다가왔다. 여러 개의 질문이 오갔고 강연자는 최대한 열심히 질문에 답해 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질문자였다.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본인이 성폭행 피해자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게 믿기질 않네요. 지금 엄청 행복해 보이시는데. 성폭행 피해자가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한 건가요? 강연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질문을 들은 강연자의 표정에는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 보였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은 망연자실함. 나 또한 그 망연자실함을 느꼈다. 성폭행 피해자는 행복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사회적 압박.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압박의 무게를 생생하게 느꼈다.

 

7월 21일

길게 느껴졌던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피곤함에 기지개를 켜며 학교를 내려가다 의류학과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건물에서 과 학생들이 무리지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과 혹은 연인과 함께 걸으며 웃고 있는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한편 작업으로 며칠 밤을 샌 건지 잔뜩 피곤해 보이는 고학번들의 모습도 보였다. 마치 과거의 선희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과거의 선희. 원래대로라면 선희도 저 틈에 섞여 작업에 피곤해하거나 시험이 끝난 마음에 홀가분해하며 친구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멀거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8월 17일

선희의 집에 가 책을 몇 권 가져다주었다. 사회인의 힐링을 소재로 한 책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은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사자도 아닌 내가 책으로 그런 어쭙잖은 충고를 하려는 것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희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설책들을 가져다주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도 있었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나는 선희가 인디언 체로키족의 소박한 생활을 읽으며 책 속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선희는 잘 읽겠다고 말하고 웃었다. 여전히 기운 없어 보이는 선희의 모습은 날 힘들게 했다. 나는 선희가 전에 남이섬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이번에 같이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선희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고 나는 애써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아까 준 소설책들과는 다른 책이었다. 나는 선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선희는 그 책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가져온 것은 컬러링북이었다. 화려한 패션쇼의 옷들을 직접 채색할 수 있게 만든 책이었다. 선희는 그것을 보고 잠시 멍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두 손으로 잡고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예쁘게 잘 색칠하겠다고.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선희의 모습에 나는 기쁘게 웃었다.

 

9월 2일

무더웠던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강이 돌아왔다. 선희는 1년 휴학을 결정했고 이번 학기에도 학교에서 선희의 얼굴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선희를 제외한 친구들과 나는 개강을 맞이해 저녁에 함께 모였다. 다른 친구들은 선희가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학업에 지친 선희가 잠시 쉬고 싶다며 1년 휴학을 결정했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 정연이는 맥주를 마시며 선희가 부럽다고 했다. 본인도 이 지긋지긋한 개강에서 벗어나 1년쯤 휴학하고 싶다고.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어 그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9월 17일

개강 후 학과 공부와 학보사 일 때문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나는 한편으로 선희가 걱정되었다. 선희는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걸까.

 

10월 21일

오늘 오랜만에 선희를 만나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는 선희가 보였다. 선희는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희의 옆에는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내가 의자에 앉자 선희는 뭐 하고 이렇게 늦게 온 거냐고 툴툴댔다. 나는 학보사 일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늦었다고, 미안하다고 웃으며 사과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밝아진 선희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놀란 한편으로는 꽤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제 정말 많이 괜찮아졌구나 싶어서. 우리는 즐겁게 음료를 마시고 평소에 좋아했던 카페 디저트도 먹었다. 선희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컴백 소식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얘기를 하는 선희의 모습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같이 여러 이야기를 쭉 이어가다 선희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뭐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쇼핑백을 여는 선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희는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며 웃고는 그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주 예전에 내가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던 신발과 만년필이었다. 꼭 돈을 모아서 사고야 말 거라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을 했던. 꽤 고가의 물건들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웬 선물이냐고 물어보았다. 선희는 웃으며 말했다ㅡ나 힘들 때 네가 많이 도와줬잖아. 그게 너무 고마워서. 물론 이런 물건들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한테 꼭 고맙다는 답례를 해 주고 싶었어. 너 기자가 꿈이잖아. 이 튼튼한 신발 신고 멋진 만년필로 취재하며 다니고 싶다며. 네 꿈을 응원하면서 주는 선물이야ㅡ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라 나는 너무 놀랐고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예전에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선물해 주는 친구가 정말 고마웠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선희야.

선희와 헤어지면서 나는 정말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선희는 진짜 괜찮다고, 너 편하게 여기서 바로 버스 타고 가라고 쾌활하게 답했다. 안녕 하고 우리는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선희에게 받은 쇼핑백을 들여다봤다. 튼튼한 워커와 값비싼 만년필이 가지런하게 들어가 있었다. 물건을 꺼내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즐거움과 동시에 친구에게서 받는 깊은 관심과 애정을 느꼈다. 히히 웃으며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 순간 생각났다. 이 버스, 이 자리. 선희의 성폭행 사실을 들었던 날 탔던 버스와 앉았던 자리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선희는 오늘 갑자기 너무나도 밝아진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생일도 아닌데 나한테 값비싼 선물을 해 주었다. 대학생 신분에 이렇게 큰 선물을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내 묵은 습관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갑자기 변한다고 했다. 선희는 오늘 꼭 멀리 떠날 사람처럼 굴었다. 멀리 떠날 사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되뇌면서 나는 선희에게 집에 잘 도착했냐는 문자를 보냈다. 금방 답장이 왔다. 선희는 잘 도착했다고 답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 한 구석에 생겨나는 찝찝함을 느꼈다.

 

11월 17일

요즈음 정연이가 나에게 선희의 근황에 대해 자주 물어본다. 대답해 주기 어려운 문제라 나는 항상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선희는 성폭행 피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정연이는 요즘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인다. 혹시 나처럼 선희 일을 눈치 챈 걸까. 미리 눈치를 채고 나한테 물어 보면 그땐 어떻게 하지. 거짓말을 할 수도, 사실을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11월 24일

정연이가 잠시 만나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평소와 달리 조용한 정연이의 모습에 긴장이 됐다. 정연이가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선희가 뭐 하고 있는지 모르지. 항상 그렇듯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정연이는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선희 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멍청하게 나는 되물었다. 정연이는 똑똑히 다시 말했다.

선희 걔 요즘 몸 파는 것 같아. 집에 돌아가면서 계속 그 말을 되뇌었다. 주변 사람들의 목격담과 몇 가지 증거가 있다고 했다. 정연이는 남을 헐뜯기 위해 말을 지어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이 문제에 대한 논리적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래. 우선 내일 선희를 만나 이야기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집으로 걸어가다 나는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선희였다. 선희도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희는 그런 나를 보며 꼭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희야ㅡ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선희는 내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수빈아, 우리 크리스마스에 제주에 가자. 흰 등대에 다시 가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선희에게 나는 멍청하게 그래, 라는 대답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2월 25일

우리는 제주에 왔다. 그동안 나는 선희에게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선희는 꼭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연이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도. 오랜만에 뵌 선희의 이모부는 여전히 인상 좋으신 분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짐을 풀고 섭지코지로 향했다.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탁 트인 공간과 넓게 펼쳐진 겨울 바다가 보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하얀 등대에 도착했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등대 밑에서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불고 선희의 갈색 머리칼이 휘날렸다. 선희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내가 선물한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선희의 흰 피부와 목도리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희가 바다를 보며 말을 꺼냈다.

수빈아. 네가 나를 이해할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말할게. 아니 아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계속 내가 더럽혀졌다는 생각을 했어. 머리로는 아니란 걸 알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지. 사회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면 저런, 고결한 순결을 강제로 빼앗겼구나 하잖아. 나는 그게 너무 싫었어. 성행위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강제로 빼앗기면 더럽혀져서 불쌍하다며 평생을 동정 받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싫었어. 그래서 나는 성행위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고 싶었던 거야. 돈을 주고받고 간단히 할 수 있는 행위라고 나에게 개념을 형성하고 싶었던 거야. 그러면 내가 덜 고통 받으니까. 성행위가 그저 가벼운 행위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더럽혀 졌다는 그날의 고통으로부터 내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해 그 선택을 했던 거야.

아아. 선희야, 선희야, 선희야.

우수빈(국어교육 16)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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