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산독립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를 예심하느라 105편의 단편과 9편의 장편영화를 보았다. 출품작 중에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연령대의 일반인들이 영화의전당 영화제작 워크숍을 통해 완성한 영화가 있고 어느 정도 필모그래피를 쌓은 삼십대 독립영화감독의 작품들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십대 영화과 학생의 영화들이다. 내게 이 영화들은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차세대 감독의 미학적 비전과 야망을 가늠해보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오늘날 한국사회 청년들의 심상을 엿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여기 청년들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고 있고 무슨 꿈을 꾸는지, 그들의 기쁨과 슬픔, 꿈과 절망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그리 크지 않다. 언제부턴가 거기엔 기쁨 대신 슬픔만이, 꿈이 아니라 절망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라고만 해두자. 이를테면 내가 독립영화로 목격한 청춘의 삶은 청년실업, 편의점 인생, 왕따, 학교 폭력, 가출 팸, 자살기도, 실연, 장애, 가족 해체, 우발적 범죄 등으로 구성된 우울하고 폭력적인 세계다. 그 세계에서 청춘들은 자주 죽음의 유혹에 흔들리고, 그보다 더 자주 가피학적인 충동에 휘둘린다. 부산의 영화청년들이 만든 114편의 영화가 여기이곳 청춘의 자화상이라면, 그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흑백의 사이코드라마 혹은 핏빛으로 가득한 공포영화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런 영화들이 부산에서만 나올 리 없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전주국제영화제나 부산국제영화제의 비전 부문에서도 그런 잿빛 영화들은 수두룩하다. 그 영화들은 상처 입고 절망에 빠진 가난한 청춘들이 세상을 저주하고 세상에 복수하려다 자멸하는 이야기거나 세상으로부터 밀려나 외롭고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해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21세기 한국청춘들의 영화는 이토록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익숙해질까 두려운 얼굴들이다. 나는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확신으로, 청춘의 표정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 와중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낯설고도 불온한 얼굴들을 만났다. 펑크밴드인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의 음악 활동과 일상적 난동을 담은 <노후대책 없다>는 제목대로 대책 없는 청춘들이 등장하는 대책 없는 영화다. 감독인 이동우는 스컴레이드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한데, 그는 펑크밴드 활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영화현장의 연출부 스텝 일을 병행하다가 ‘감독 일이 더 멋있어 보여서’ 이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내부자의 영화다.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들인 똘끼 충만한 정신 나간 청춘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상화되지 않고 무색무취한 카메라 앞에 무방비하고도 진솔하게 설 수 있었다. 

우선 나는 펑크음악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는 점을 밝혀두기로 하자. 문외한인 내게 욕설과 분노로 채워진 소음에 가까운 그들의 음악은 엔딩타이틀이 올라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히 고성방가를 면치 못했지만, 반면에 그 뮤지션들은 희귀하게 빛나는 영웅적인 청춘상으로 등극했다(스컴레이드가 미국에서 앨범을 발매했을 때, 미국 잡지는 “알 사람은 다 알지만 모를 사람은 평생 모를 밴드”라고 그들을 소개했다는 사실을 여기 덧붙여둔다). 말 많고 시끄럽고 비전 없고 가난한 그들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펑크록으로 발산할 때, 거기에는 파괴적인 충동 대신 삶의 활력과 청춘의 패기로 충만해진다.  

그들 청춘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상찬하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청춘의 바람직한 지표나 표본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 삶을 긍정하고 패기를 잃지 않는 것, 세상이 그들의 무릎을 꺾을 때 목청 높여 분노를 표출하는 것. 우리가 잃어버린 청춘의 표정이 거기 있었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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