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는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극의 전반적인 흐름을 지배하고 있는 이는 블라디미르도, 에스트라공도 아닌 ‘고도’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실없는 수작과 부질없는 언행을 일삼으며 열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목적은 단 하나, 오지 않는 ‘고도’를 만나기 위해서다. 고도,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에스트라공 하지만 우린 약속을 받았으니까./블라디미르 참을 수가 있지./에스트라공 지키기만 하면 된다./블라디미르 걱정할 거 없지./에스트라공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블라디미르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사무엘 베케트(1952), 민음사, 오증자 역(2000), <고도를 기다리며>, p. 60)’

이 대목을 보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이미 고도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수능을 치고 나서는 원하는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렸고, 유명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긴 줄을 기다렸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식 날짜를 기다렸다. 많은 정성과 노력, 시간을 들여 얻은 것일수록 기다림의 고통은 적었고, 결과는 달콤했다. 반면 쉽게 얻은 것은 대개 쉽게 사라졌으며, 아쉽지도 않았다.

원작자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가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에 ‘그걸 내가 알았으면 작품에 썼을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가 작중에 고도의 정체를 명시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고도를 누구로든, 무엇으로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에게 고도는 부(富)일 것이며, 어떤 이에게는 권력이나 성공일 것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사랑일 것이다.

다만 고도를 기다리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때때로 다르다. 블라디미르와 같이 ‘목을 매고’ 싶을 정도로 무력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에스트라공과 같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그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한다. 어제와 같은, 그러나 절대 어제 같지만은 않은 오늘의 하루를 보내며, 어딘가로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다.

고도는 희망 그 자체다. 우리는 그로 인해 힘겨운 인생을 견딘다. ‘내일은 오겠다’는 그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최소한) 목을 매지는 않게끔 만든다. ‘인생 선배’를 자처하는 이 시대의 많은 기성세대들은,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이 없는 청춘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젊음을 젊음이게 하는 정신은 바로 열정, 무모함, 일탈 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시대의 청춘을 대표하고 있는 여러 단어들 또한, 어떤 이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는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해, 이다지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해 둔 계획이나, 자명한 목적이 없어도 괜찮다. 그저 버텨내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어도 괜찮다. 우리는 삶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다. 먼 미래를 꿈꾸지 않아도 좋다. 고도는 ‘내일’ 올 것이다. 실상 없는 기다림, 그러나 희망. 종국에는 극복사로 쓰여 지고야 말 것임을 믿기 때문에.

김솔(철학 석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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