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이 사라예보에서 만난 한 여인은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반대 명제 역시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불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모두가 불안을 말하는 사회, 끝없는 경쟁과 사회적 죽음의 위협에 내몰리는 사회. 이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적으로 불안하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만연한 고독 속에서 사람들은 타자에게 보이고 들려지는 경험을 잃게 되고, 결국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세계 그 자체의 의미도 상실하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관점들과 그것들이 교환되는 소통의 공간이 존재하는가? 혹시 공동체적 이슈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삶에 대한 불안과 세계에 대한 냉소만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오직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내던져졌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의 공간(interspace)에서 형성되는 공통 세계가 사라졌다는 데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세계 소외’라 표현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사회와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이는 불안한 우리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단이자 경고이다.

그렇다면 현재 부산대학교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사람들 사이의 사이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가? 학내 구성원들은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지 않으리라고, 자신이 느낀 감각을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며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가? 다행히 부산대학교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학사제도 개선안에 대한 의견제시나 공간채산제 개정의 촉구, 공익에 충실한 대학,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대학을 만들자는 주장, 비정규직 교원을 양산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과 우려, 수많은 호소와 성명서들. 그런데 문제는 이렇듯 통절한 호소와 비판이 제대로 응답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대학본부는 자본주의적 척도로 학문을 유용함과 무용함으로 나누고 학내 구성원들 역시 유능함과 무능함으로 구분하여 위계화하고 있다. ‘쓸모’라는 단 하나의 척도가 학교를 전적으로 지배하게 될 때 구성원들은 분리와 소통불가능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학내 구성원들이 이 척도를 내면화하게 되면 스스로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학문에 대한 존재 의의마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불통이 만연한 대학의 현실 속에서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냉소가 팽배하게 되고 학내 구성원들은 낱낱이 분리되어 각자 도생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대학에서 토의와 의사소통이 중단된 상태, 학내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사적 삶에만 집중하게 되는 상태, 학교가 기업화된 상태, 이것은 분명 ‘학교 소외’다. 학교가 공적 공간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은 다양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권리와 함께 자신의 행위와 의견에 대해 응답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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