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03년 덴마크에서 연구년을 보낸 이후 행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그동안 행복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관계성이었다. 소위 행복도가 최상위 그룹에 속하는 나라들은 매우 평화스럽고 조화롭게 산다.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공유하고 있다. 부연하면 공존의 규범이 매우 확고하다. 이러한 사회에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윤활유가 풍부하다. 당연히 사람들 간의 마찰계수가 낮다.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윤활유란 무엇일까? 타인을 위한 미소와 배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 무엇보다 타인을 귀히 여기고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우리 사회로 시선을 돌려보면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든다. 대한민국은 지난 30~40년 사이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어 이제는 매우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됐다. 필자는 전세계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봤지만 우리처럼 잘 먹고 잘 마시고 좋은 옷을 입는 나라를 별로 보지 못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사람들 간의 관계성이 매우 취약하다. 우리에게는 공존의 규범이 약하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부족하다. 행복한 사회가 타인을 위한 여백을 넓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여백이 매우 좁은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려 하면 모두가 나서서 자신의 동네에는 안 된다고 몸을 던져서 반대한다. 서울 강서지역의 어느 동네는 주민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면서 자기 지역에는 장애인 학교를 지을 수 없다고 호소한다. 장애아를 둔 학부모들도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무릎을 꿇고 지역주민들에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들어섬으로 인해서 이들의 재산 가치가 감소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들이 무릎을 꿇는 모습은 눈물겹지만 그러면 장애아들은 어디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때 마침 교환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이 사례를 설명하고 자신의 나라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물었다. 모두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상황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 유럽에서 온 학생들은 좀 더 강하게 얘기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온 교환학생은 만약 자신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장애인 학교를 반대하며 시위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거의 매장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학생은 또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반대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 있는 외국인 교수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거의 비슷한 대답이었다.

행복론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 관계성에 문제가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공동체성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사회구성원 간에 서로 돕고 배려하고 지원하는 정도가 가장 낮다는 얘기이다. 대한민국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나라의 관계성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경제성장에 집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경제성장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처럼 굳어 버렸다. 경제성장을 강조하고 지배적인 가치로 인식하는 문화가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역효과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경제 지상주의는 극단적인 물질주의를 유발했고 이는 공동체를 원활하게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윤활유를 소진 시켜 버렸다. 즉, 타인을 배려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앗아가 버렸다는 말이다. 물질주의는 전후좌우를 돌아보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 형제간의 관계도 붕괴시킨다. 우리의 경제발전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의 질은 악화시켰다. 경제성장이 ‘좋은 삶’에 이르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건강한 성장이 아니다. 이는 정치지도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과제다.

 

박세정 계명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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