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미친 듯이 온 마음 다 바쳐서 사랑해” 2015년 가수 다비치가 발매한 음반 <두사랑>의 일부 가사이다. 노래는 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내 두 사랑은 한 사랑보다 깊어”라고 고백한다. 노래를 들은 대중들은 ‘어떻게 저런 사랑이 있을 수 있어’, ‘두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바람을 옹호하는 거 아니냐’며 가사 내용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한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않는 ‘폴리아모리’가.

 

개념을 알아도 아직 폴리아모리는 낯설기만 하다. 스스로 모노아모리로 평생을 살았고, 주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그 전에 존재하기는 할까? 이 의문의 답을 얻어 보고자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의 저자, 그리고 그 스스로도 폴리아모리인 철학공방 별난 심기용 연구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너도 사랑한다’는 말의 속마음

△본인도 폴리아모리라고 들었다. 어떻게 자각하게 됐나.

모노아모리의 삶이 불편하다고 느낀 건, 첫 연애에서예요. 한 사람을 사귀자마자 숨이 막히더라고요. 내가 뭘 하고, 누굴 만나는지 일일이 보고하고 연락하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내가 왜 다른 누구를 만나면 안 될까? 왜 나의 모든 관계가 누군가의 애인으로 환원될까? 그러다 내가 좋아한 애인의 모습이 ‘나만의 애인’이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뻗어갔어요.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던 한 사람을 사랑한 거지, 나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구속된 모습을 좋아했던 게 아니었죠.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놨어요. 그리고 거하게 깨졌지. 헤어지고 나서 지인들에게 제 고민을 상담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네가 이기적이야’, ‘네가 사랑을 모르는 거야’라고 말했죠. 그러다 한 레즈비언 누나가 “폴리아모리라는 게 있어”라고 말해줬어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폴리아모리의 뜻을 찾아봤어요. 그러곤 무릎을 탁 쳤죠. 아, 이거지! 이렇게 살면 되지! 왜 스스로 독점적인 관계를 요구하고, 그에 환상을 가져왔을까? 일종의 해방감까지 느껴지더라고요.

△폴리아모리를 직역하면 ‘다자연애’인데, 우리말로 ‘비독점적 다자연애’로 번역됐다. 폴리아모리의 핵심 개념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여기서 ‘비독점적’은 무얼 뜻하나?

저도 그 의역이 너무 신기했어요. 누가 저렇게 번역을 잘해놨을까. 폴리아모리는 ‘다자’보다는 일대일 독점관계가 아닌 ‘비독점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거든요. ‘다자’만 있엇다면 오해가 더 커졌을 거예요. 독점에 반대하는 신념, 태도보다 몇 명의 사람을 만나냐에 더 집중했겠죠.

‘비독점’의 개념 층위는 두 가지로 나뉘어요. 하나는 ‘컴퍼션’인데요. 타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자신에게도 발생하는 긍정적인 감정을 말해요. 타자와 공동의 입장, 관점이 되어 생각하는 거죠. 다른 하나는 소유 개념으로부터 탈피인데요. 타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긍정하는 거예요. 모노아모리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요. 하지만 상대의 관계를 긍정하고 그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느끼는 폴리아모리가 더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나와의 관계 속에서 만의 타자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도 쌓고 감정도 변할 수 있는 사람을 수용하는 거죠. 

△이상처럼 느껴진다.

극단적으로 말한 부분도 있어요. 어떻게 인간이 모든 일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있겠어요. 비독점적인 사랑의 개념을 극한까지 해석하면,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죠.

문제는 폴리아모리 스스로가 이상적인 사랑을 실천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비난하기 때문에, ‘폴리아모리도 사랑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내가 보여줘야 돼!’라고 생각하는 거죠. 전 단번에 틀렸다고 이야기해요. 폴리아모리는 윤리적이고 올바른 사랑 방식을 추구하자는 개념이 아니에요. 본인이 비독점적 관계에서 탈피해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거죠. 폴리아모리의 인격이 나쁠 수 있어요. 질투도 많이 할 수 있고요. 폴리아모리의 연애가 늘 행복하게 끝나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그건 일대일 연애 관계도 마찬가지잖아요. 하지만 이성애가 문제라고 하지는 않잖아. 아직 폴리아모리스트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잘 접해보지 못해서 또 낯설어서 이런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부당하다고도 보는데, 사회구성원의 기대감을 줄여야할 것 같아요.

△비독점적인 사랑을 하는 폴리아모리는 독점욕을 부정하는 건가?

자연적으로 우리 모두가 폴리아모리에요. 누군가는 특정한 한 명, 다른 누군가는 두 명이나 세 명 사랑하는 등의 다양한 의식적 선택이 가능한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모노아모리도 폴리아모리의 범주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원래는 폴리아모리인거죠. 문화적, 의식적으로 모노아모리가 됐을 뿐이죠. 그래서 독점욕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보지는 않아요.

현대 사회 속에서 독점욕이 생길 수 있다고 봐요. 모노가미가 우세하니까요. 그러나 독점욕이 당연하다고 전제되는 현재 사회는 비정상적이에요. 모노가미 속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이 독점 관계에서만 이뤄진다고 믿어요.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독점하지 않거나, 누군가 나를 독점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해요. 거기다 독점 관계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면 죄의식과 죄책감까지 느껴요. 

이게 단순하게 한 사람과 계약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에요. 이건 문화적 소산이에요. 그렇게 해야만 안정적인 사회가 가능할 거라는 의식이 머릿속에 박힌 거죠. 여태 문학과 방송 등의 미디어가 그런 내용을 전파했고, 이상적인 가족상을 내세웠으니까요. 우린 그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거죠.

모노가미 속 폴리아모리의 삶

△최근 우리나라에 ‘폴리아모리’ 단어가 이전보다 눈에 많이 띈다.

비가시적이지만 사회 흐름이 변하고 있어요. 모노가미로 포섭할 수 없는 감정들이 노출되고 균열이 생기고 있어요. 이혼, 바람, 외도의 비율이 점점 올라가고 있잖아요. 모노가미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게 아니라는 거죠. 성이나 사랑에 대한 상상력이 넓어지고 있는데,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개념이 없었어요. 이에 ‘폴리아모리’가 징검다리 개념이 돼 준거죠.

하지만 아직 이행단계에요. 폴리아모리끼리 우스갯소리로 ‘한국 사회에는 태양아모리가 제일 많아’라고 해요. 태양의 <나만 바라봐> 가사에 ‘나는 다른 사람 만나도 넌 나만 바라봐’가 있잖아요. 나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지만 타인은 그럴 수 없다는 거죠. 자신에게만 비독점적인거에요. 나의 사랑과 자유는 이해하지만 타인의 것은 이해 못하죠. 왜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을까요? 먼저 자기 개발이 잘 되는 사회가 온 거죠. 내 욕망에 맞춰 솔직하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건 배웠어요. 근데 타자에 대한 이해는 아직 빈약해요. 활발해진 성소수자 운동도 원인이에요. 성과 사랑에 대해 ‘와이 낫’ 정서가 퍼졌어요. 나의 성적 욕망을 낙인찍고 배제하는 형태가 권력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된 거죠.

△우리나라에 폴리아모리가 안착하려면, 어떤 의제가 논의되어야 하나.

폴리아모리끼리 만나야 해요. 그리고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해요. 폴리아모리는 사례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서로가 사례가 되어 공유하고, 지혜를 모아야 해요. 거기다 폴리아모리로 살고 싶은 사랑, 비독점적인 사랑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까지 더해질 수도 있겠죠. 그렇게 폴리아모리 삶의 방식을 구축하고, 사회에 전파하는 게 급선무에요.

이때 사회구성원들은 모노가미를 잣대로 비난하지 않았음 해요. 기존 지식 체계에 없어서 몰랐던 거지, 주위에 폴리아모리는 있어요. 본인 삶의 궤적이 어땠기 때문에 다른 삶을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거죠. 이렇게 알리고 받아들이면, 언젠가 폴리아모리가 내 친구고 이웃이 되는 순간이 오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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