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반대로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다. ‘5월 5일은 무슨 날?’ ‘어린이날!’처럼 사회적 합의에 의해 누구나 수용, 납득 가능한 결론이 아니라, 온전히 ‘나’에 대한 것을, 혹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잡는 등의 위로와 대응이 상대에게 얼마만큼 가닿을 수 있을까. 어쩜 일련의 행동들은 내가 당신을 이해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기 위안’, ‘자기기만’이지 않을까. 이런 의문들은 소설을 쓰는 과정 내내 이어졌다. 누군가의 삶을 조직화하고 형상화하는 소설 쓰기가 작가의 일방적인 폭력에 가깝지 않는가, 하는 회의와 자책으로 말이다.

이러한 질문과 회의에 빠져 있는 중에 조해진의 소설을 읽었다. 장편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벨기에 브뤼쎌을 배경으로 탈북인 로기완과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방송작가인 ‘나’는 우연한 기회에 벨기에로 밀입국한 함경북도 출신의 로기완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 로기완이 3년 동안 쓴 일기를 바탕으로 그의 행적들을 따라가는 것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이다.
탈북인, 재일조선인, 난민, 디아스포라 등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부유하는 이들에 대한 소설은 그동안 많이 있어왔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해 놓은 작품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그리 색다른 것도, 신선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 눈이 가는 것은 탈북인 로기완을 대하는 소설 속 ‘나’의 자세, 더 나아가 이들을 형상화해 내는 작가의 태도가 미더웠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로기완에 대해 무언가를 쓸 자격이 내게 있는 건지 자신할 수 없다.”, “굶주림이란 역사책이나 영화 같은 데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해봤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건 컴퓨터게임 속에서나 일어나는 가상의 일이라고 여겨왔으며, 국적을 잃은 자의 병적인 불안감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나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이곳 사람들은.”, “그런데 로의 어깨를 잡아주던 브로커의 그 손은 따뜻했을까. 로에게 순간적인 위로라도 주긴 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은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인 로기완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나’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서술되어 있다. 소설 곳곳에서 위에 언급한 구절처럼 자신이 하는 행위와 로기완 대해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머뭇거림과 주저는 대상에 대해 확신 없는 나의 소심한 행동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 손쉽게 재현되거나 일반화될 수 없는 타자의 삶을 이해하려는 진중함에 근거한다. 로기완의 내밀한 일상과 생각이 기록된 일기를 읽고, 그가 살았던 집과 머물던 공간을 따라가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과 자료에 근거한 사후적인 유추일 뿐. 나는 로기완이 그 당시 가졌던 감정과 생각, 행동들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설은 타인에 대해 말하면서도, 타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브뤼쎌에 와서 로의 자술서와 일기를 읽고 그가 머물거나 스쳐 갔던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로기완은 이미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이제 나는 로에게도 나를, 그 자신이 개입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나’는 로기완의 고통에 섣불리 연민을 느끼거나, 동정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과 태도로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로기완을 섣불리 대상화하지 않는 과정에서 그가 내 삶에도 깊숙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다. 타자를 알기 위한 여행에서 역설적으로 나를 알아가는 것. 비록 타인은 영원히 타자로 남겠지만,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한 발짝 다가가는 것. 모든 관계의 시작은 거기서 출발하는 것임을 소설은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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