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지난겨울 우리의 바람은 얼마나 강렬했던가. 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촛불을 들고 얼마나 소리 높여 외쳤던가. 우리의 아우성은 성곽 같은 경찰 차벽을 넘어서, 구중궁궐 청와대 철문도 열어 재꼈다. 혹자는 이 봄을 민주주의 승리라 하고, 혹자는 위대한 시민혁명의 완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리’나 ‘완성’과 같은 말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겨울을 보냈다고 봄이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봄을 즐기기 위해서는 꽃과 풀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겪은 ‘겨울’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이 무섭도록 춥고 어둡게 느껴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총칼을 앞세운 군부독재도 아니었고, IMF와 같은 경제위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통과 공감이 부재한 시대였다. 세월호, 메르스 사태,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과 도탄에 빠진 국민들의 호소를 끝끝내 외면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총칼의 위협보다 더욱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 그렇다. 우리가 겪은 겨울은 우리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정부, 국민 개개인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정부였다. 지난 몇 개월간 20회가 넘는 촛불집회는 그동안 무시당했던 우리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야할 가치가 충분한, 그런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 왜 그런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던 그 정부는 무너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지독한 생존경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는 미덕을 잊어버린 듯하다. 상대방의 실패가 곧 나의 이익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으랴. 내 작은 실수 하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내 내면의 두려움을 호소할 수 있으랴. 생존경쟁의 늪에서 소통과 공감은 있을 수 없고, 오직 두려움과 불신뿐이다. 무한경쟁의 현실은 여전히 춥고 매서운 겨울이다.

새로운 생명과 희망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 무한경쟁의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 상대평가제도, 성과연봉제와 같이 경쟁을 부추기는 제도를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무한경쟁의 그물에서 벗어나,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서로 도울 수 있는 친구로 받아들여야 소통과 공감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대학은 우리사회의 희망을 찾는 공간이다. 우리 사회를 차가운 겨울에서 봄으로 변화시킬 씨앗들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학생들이 숨을 쉬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교육제도를 변화시키자. 서로를 경쟁상대로 바라보게 하는 교육제도 아래에서 학생들은 결코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없다. 학생들 개개인의 가치와 특성들이 존중받는 교육. 서로 다르기에 서로 도울 수 있는 존재임을 깨우치는 교육. 다양한 학문의 가치가 존중되는 교육. 우리 부산대학교가 이런 교육제도를 갖춘 대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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