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날씨 탓이 아니다. 태풍이 지나간 오사카의 여름은 덥고 습했지만, 남은 잔상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3년 전, 필자는 본지 편집국장으로서 해외취재를 떠났다. 20년이 넘도록 연대해왔다는 지역대학언론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기대를 안고 찾은 ‘UNN신문사’는, 한마디로 열악했다. 허름한 편집국은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고, 천장까지 쌓아놓은 신문이 날릴까 선풍기조차 틀지 못했다. 속사정은 더했다. 연합한 9개의 언론 모두 재원을 스스로 마련해야했다. 제작과 발행에 급급했기에 취재비는커녕 원고료나 활동비조차 없었다. 워낙 달랐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언론은 학교 부속기관이고, 제작비는 물론 기자들에게 일정의 대가도 주어진다. 때문에 취재가 끝난 뒤, 이들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다행이다’ 따위의 안도감이 진하게 남았었다.

착각이었을까. 며칠 전의 한 기사에 뒤통수가 아렸다. 학교 측의 편집권 침해로 한 대학언론이 백지 발행을 감행했다는 보도였는데, 이에 대한 대학 관계자의 발언이 가관이었다. ‘예산이 학생처에서 나오기 때문에 대학신문은 학생 신문이 아닌 학교 신문’이라는 궤변 말이다. 일순 안도에 묻혀있던 기시감이 새어나왔다. 상대적인 안정감 속에서 활동한 덕에 외면했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학교가 비판적 보도에 반발해 신문을 수거해버렸다던가, 학교에 비판적인 주간교수를 정식 임명하지 않았다던가하는 일들. 대학언론의 백지 발행 역시 처음이 아니었다. 당최 이유를 알 수 없는 ‘몰상식’의 연속은, 결국 이 때문이었다. 당연한 것들에 대한 부정. 그네들의 추악한 행동 근간에는 ‘대학신문은 학교 신문’이라는 사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럴듯하다. 학교에서 예산을 지원한다는 점, 학교 부속기관이라는 점, 발행인이 총장이라는 점. 대학언론의 이 ‘기형적 구조’가 그네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헌데 따져보면, 얼토당토않다. 그네들의 말마따나 대학언론이 ‘학교 신문’이라면, 학교는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들을 ‘고용’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한다. 예산은 왜 학생처로 편성돼있는가? 홍보실 부속기관으로 두면 될 것을 말이다. 아니, 애초에 이름부터 잘못이다. ‘신문’이 아니라 ‘홍보지’나 ‘기관지’ 따위가 어울릴 일이다. 이런 모순은, 그들이 빤한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대학언론의 구조가 기형일 수밖에 없는 이유 말이다.

대학은 작은 사회다.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총장과 총학생회가 임명되고, 이들이 학생들로부터 등록금을 받아 학교를 운영한다. ‘권력’과 ‘자금’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이 필요하다. 대학언론은 이런 필요성을 인정받았기에 학교 부속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산 지원의 당위성 역시 그 필요성과 비례하고, 발행인이 총장이라는 점은 구조에 따른 부산물일 뿐이다. 대학이 ‘교육기관’이기에 마땅한 일이다. 이를 간과한다면 그저 야만일 뿐인데, 우리는 이를 겨우내 겪지 않았는가. 이 끔찍한 악몽에는 갖가지 언론이 나부꼈고, 우리는 이를 고스란히 떠안으며 그 영향력을 몸소 느꼈다. 명색이 교육기관인데, 부끄러운 짓을 답습하지는 말자.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안 될 일이기도 하다. 지극히 정상(正常)만을 바란다. 과욕은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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