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유사하지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Spencer Johnson, Who Moved My Cheese)와 <치즈는 어디에?>(Deepak Malhotra, I Moved Your Cheese)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주 다르다. 전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오로지 치즈를 찾는 일에 열중하라고 가르치는 반면 후자는 치즈를 쫓는 일 이외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우화에서 물질적인 재화와 사회적인 성공을 상징하는 치즈는 그 자체로 행복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좇는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던가!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둘러싼 치즈와 미로라는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화에서 제드, 맥스, 빅이라는 세 마리의 쥐는 치즈 찾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치즈 찾는 일밖에 모르는 대다수의 쥐들과 많이 다르다. 대다수의 쥐들은 치즈를 남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찾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몰두하지만, 이들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치즈만 취할 뿐이다. 대신에 이들은 미로 속 쥐들과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탐구하는 대화를 즐기거나, 치즈를 감춘 미로의 원리를 터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하는가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로운 삶을 즐긴다. 이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사는 일, 즉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는 일의 중요성이다.
  나의 삶에 대한 결정권은 나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살 것인가, 주어진 삶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삶을 살 것인가. 자각적인 삶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확장하는 방향의 삶이라면, 주어진 삶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삶은 자기 삶의 주권을 포기하는 방향의 삶일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겪으면서 “가만히 있으라!!”는 비극적인 메시지로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이와 달리 제드, 맥스, 빅이라는 세 마리 쥐들은 대다수의 쥐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주어진 미로라는 환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엇 때문에, 누가 치즈를 옮기는지, 어떻게 미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질문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치열한 삶을 통해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나의 삶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치즈가 숨겨진 미로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 얽매여 있다. 그래서 우화 속 세 마리 쥐처럼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자신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치즈 찾는 규칙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 또 규칙이 공정하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미로를 설계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거나 특정한 계층에게만 유리하도록 설계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판단으로 신념으로 실천으로 연결되는 만큼 나의 삶도 확장되리라.

조해정(철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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