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진 1980년대,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보호법>이 제정됐다. 이어 1987년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출범했다. 2007년 <소비자보호법>이 <소비자기본법>으로 이름이 바뀌며 한국소비자보호원도 한국소비자원으로 변화했다. 소비자 권익 증진과 소비자 주권 실현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 한국소비자원. 그곳에서 ‘소비자와 함께 만드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뛰고 있는 소비자안전센터 손성락(경영학 79, 졸업) 소장을 만나보았다.

 

△한국소비자원(이하 소비자원) 내에서 소비자안전센터가 맡은 역할을 설명해 달라.
  소비자원은 소비자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크게 두 가지 업무를 담당한다. 하나는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는 업무고 다른 하나는 소비자 피해를 사후구제 하는 일이다. 소비자안전센터는 이 중 소비자 피해 예방, 그 중에서도 생명이나 신체의 위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는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정보를 위해정보라고 부른다. 소비자안전센터는 위해정보 수집을 위해 다양한 채널을 마련했다. 우선 전국 62개 병원과 업무 협약을 맺어 응급실이나 의무기록실에서 나오는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 또 18개 소방서와 협력해 119 출동 정보도 얻고 있다. 이렇게 수집되는 위해정보가 1년에 6만 5천여 건 정도 된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분석해서 어떤 위험 요소가 있는지 찾아낸다. 그리고 즉시 피해를 막아야 된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소비자 주의보를 내리고 언론을 통해 공개한다. 문제가 있는 제품을 회수해서 퇴출시키는 것을 리콜이라고 부르는데 때때로 사업자들을 불러 리콜 권고도 한다. 관련 법규가 미비하거나 잘못되어 있는 경우에는 정부 관련 부처에 제도 개선 건의를 하기도 한다. 소비자들이 최대한 안전하게 소비생활을 할 수 있도록 피해를 예방하는 종합적인 활동을 맡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부터 소비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경주 시골 출신인 ‘촌놈’이다. 그땐 참 다들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데 대한 동경이 많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일에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전공도 경영학이었기에 경영자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였다.

△그럼 소비자원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된 것인가.
  세상사는 게 자신의 의지대로만 되지 않더라.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서 학사장교로 복무했다. 제대하고 난 뒤에는 삼성화재에 입사했다. 사실 나는 유통 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는 신세계가 삼성 계열로 있었는데 거기서 유통 업무를 배워 나중에 창업을 해야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필 신세계 쪽에서 직원을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삼성화재 쪽으로 배치가 됐다.
  그렇게 삼성화재에서 1년 정도 일했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신문>에서 소비자원 모집 공고를 보았다. 1987년 7월에 소비자원이 설립되면서 이뤄진 최초의 신규 직원 채용이었다. 뭔가 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그때 바로 근무를 시작했으니 내년 7월이면 딱 30년째다. 지금은 임원으로 있지만 이전에는 △민원 △교육 △정보수집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실제로 보람을 찾았나?
  소비자들은 상대적 약자다. 기업을 개별적으로 상대해서는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과거 민원 업무를 담당할 때는 사업자와 중재를 잘 해서 소비자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보람이 많았다.
  안전업무를 담당하고부터는 시중에서 위험하고 문제가 있는 제품들을 찾아서 퇴출시켰을 때, 그렇게 해서 소비자 안전이 확보되면 뿌듯함을 느낀다. 작년에만 100여 건 정도의 제품 퇴출이 있었다. 올해도 연말까지 170여 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소비자안전센터 소장으로 있는 동안은 소비자들이 보다 더 안전한 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일에 주력하고 싶다. 퇴직 후에는 소비자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소비자 의식 선진화에 매진하고픈 마음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의식수준이 과거에 비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 최근 ‘노 쇼’라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지 않나. 또 한편으로는 기업들이 좀 더 소비자 중심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 학교 재학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나?
  한창 민주화 바람이 불 때 대학을 다녔다. 2학년 때는 부마민주항쟁이 있었다. 젊은 혈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동참했다. 아주 적극적으로 함께하진 않았지만 아직 기억나는 대목이다. 또 그때만 해도 서클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나는 봉사서클에서 활동했는데, 시골에 봉사활동을 가서 낮에는 마을 정비하고 밤에는 야학을 했다. 그 추억들이 오래 남아있다. 그때 봉사활동 했던 게 사회에서도 이어져 지금 직장에서도 사회봉사단 단장을 맡고 있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많았다. 그땐 ‘한강 이북에는 서울대학교, 한강 이남에는 부산대학교’라고 말했었다. 학생들이 성실했고 뚝심도 있었다. 그때 학교를 함께 다녔던 사람들과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 요즘에도 두 달에 한 번 정도 상과대학 동기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꾸준히 50명 정도가 온다. 취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만든 모임인데 지금은 굉장히 정착이 잘 됐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으로 사회가 더 다양화 될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면 길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서 ‘여기가 좋다, 유망하다’ 한다고 해서 그쪽으로만 쏠리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으면 한다. 그게 당장은 빛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끈기를 가지고 뚝심 있게 나아가면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다. 인생이 짧지 않나.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후회가 없다. 시련을 겪고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많을 것이다.
  지방대학이라고 전혀 주눅들 필요 없다. 후배들이 늘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는 자세, 프라이드를 지녔으면 좋겠다. 그런 자심감과 뚝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생활하면 좋은 결실이 있으리라고 본다. 우리 후배들이 모든 분야에서 역할을 다 하고, 그렇게 자신과 사회를 모두 발전시키는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학교가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앞으로 어떤 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보나?
  70주년이라는 게 참 큰 의미를 지닌다. 사람으로 보면 고희(古稀)가 아닌가. 이제 100주년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할 때다. 사람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모두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 법이다. 나는 우리 대학이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항구도시, 개방적인 도시가 아닌가. 그런 도시의 대학으로서 개방적인 대학이 되었으면 한다. 항상 열려 있는 대학. 해외에서도 한국의 대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학이 되면 좋지 않겠나.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글로벌한 대학이 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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