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날들이다. 문학판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먼저,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밥 딜런’이 수상했다.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낸 공로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은 밥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극찬하며 “그의 작품은 시로 읽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훌륭하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 음악인 밥 딜런의 수상소식은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이견을 낳았다. 그의 수상을 반대하는 이들은 밥 딜런의 가사가 아무리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하여도, 그것은 음계와 리듬이 있어야 완성되는 ‘가사’일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문학작품의 인기가 떨어지고 책을 읽는 인구가 줄어들었다고 문학의 본질적인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찬성하는 입장은 우리나라의 시조도 노래로 불렸던 것이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여운, 성찰을 주었다면 그게 바로 문학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정해진 장르만을 ‘문학’이라 칭하는 것은 문학 원칙주의, 본질주의 더 나아가 보수주의라며 비판했다.
  어떤 입장이든 자신이 가진 ‘문학관’에 비추어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을 평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이란 ‘어떤’것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을 두고 내게 던져진 물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문학의 외연이 넓어지고, 다양한 장르까지 포섭하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응어리처럼 남았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트위터의 해시태그가 가져온 ‘#문단_내_성폭력’ 문제였다. 유명 소설가부터 진솔한 시를 써왔다고 평가되었던 시인과 독창적인 시 세계를 만들어 문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젊은 시인까지 많은 이름들이 언급되었다. 성폭력을 고발한 이들은 주로 문예창작과 학생이나 등단을 꿈꾸던 문학지망생이었다. 가해자는 대부분 그들의 선생을 자처했던 이들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과 욕망을 내세워서 약자인 여성문학지망생을 성적 착취한 일이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작품을 좋아하고 선망했기에 그들의 성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 부분을 읽으며 가해자 작가들이 쏟아낸 언어들이 한갓 치장으로 가득 찬 미사어구일 뿐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작품에 감동했던 시간과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까지 모조리 능멸당한 듯했다. 내 감정이 이 정도인데 직접적인 가해를 받은 피해자의 심정은 어느 정도일까. 단순한 절필과 사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었다. 오랫동안 발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피해자의 목소리로 공론화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럼 작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글과 글쓴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머릿속은 해결되지 못한 물음들로 잠식되어 갔다.
  그리고 다시 사건이 터졌다.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최고 통치자가 정말로 ‘첨삭 받은 연설문’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연설문이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기 전에 미리 작성해 놓은 글’이라고 초등학교 국어 시간부터 배워왔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말한 모든 말과 글은 누구의 생각이며 주장이란 말인가!그 글의 주인은 첨삭한 연설문을 통해 상상 못 할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그 결과 엄청난 이득과 권력을 휘둘렀다. 누군가의 언어를, 글을, 사고를, 지배한 결과였다. 해결되지 못한 내 물음들에 대한 답은 여기서도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Literature)이, 문학적(Literacy)인 글이 어떠한 경우라도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지켜야 되는 최소한의 윤리가 아닐까 한다.

오선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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