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우리나라뿐이겠냐만은 전 세계가 대내외적으로 떠들썩하다. 하루에 한 번씩 어느 나라에 테러가 발생해서 수십, 수백만 명이 죽었다든가 묻지 마 범죄로 선량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 최저임금, 청소년·노인 자살률 등은 대한민국의 만성적인 사회문제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용어가 헬(Hell)조선인 것만 보아도 현재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디서부터 발생한 것일까? 나는 그 원인을 ‘공감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젠가 본인의 저서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대개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타인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려와 관용이 부족한 사회로 나아가고 이것이 심해져 오늘날의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급 6,030원을 받고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비정규직 사람들을, 자식들을 먹이고 키웠지만 쪽방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입장이 한 번이라도 되어봤다면 (혹은 되어보려고 노력했다면) 세상은 좀 더 살만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여태껏 친구, 가족들 혹은 그 누군가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해 왔는가.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친구가 내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나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면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내 생각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곤 했다. 그 친구가 왜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깊게 생각해보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의 생각, 상황, 아픔에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내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에게서 반감을 느꼈던 행동을 무의식중에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위선자가 되어 겉으로만 성과를 내려고 하는 인간은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나는 단연코 독서를 권하고 싶다. 왜 하필 독서냐고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나 스스로가 독서를 통해서 내면이 성숙해져 가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책, 특히 고전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고,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때 주인공의 감정 혹은 상황을 충분히 공감할 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후자일 경우 왜 그러한 상황에 공감할 수 없는 것인지, 어떤 다른 상황에 처해있기에 그러한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받아들인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은 공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공감’을 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면 가까운 주변인부터 시작해 보자. 앞서 말한 사회적 약자 분들이 나 혹은 당신의 주변인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은혜
(일어일문학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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