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중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를 통해 한 번쯤은 만나봤을 이름 ‘윤동주’. 우리는 그를 교과서에서 민족의 한과 고통을 대변한 작품을 다수 발표한 저항시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정작 윤동주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거듭 이야기 했고, 영화 <동주> 속 윤동주(강하늘 분) 역시 “이 시대에 시를 쓰고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대체 윤동주 시인은 그의 삶에서 무엇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영화 <동주>는 윤동주 시인과 그의 절친 송몽규(박정민 분)의 삶을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된 현재와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비춘다. 과거 이야기는 그들의 고향 북간도 용정에서 시작한다. 절친한 친구인 동주와 몽규는 서로 문학, 사상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둘은 조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동주가 방에서 자신의 시를 꾹꾹 눌러쓰는 것에 그치는데 반해, 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학교 선생님의 눈에 띄어 중국으로 항일 운동을 떠나기도 한다. 대학교를 진학한 후에도 비슷했다. 둘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 문예지를 만들거나 자신들의 생활 곳곳이 침투하는 일제에 반항하지만, 그 모습은 사뭇 다르다. 몽규는 학교 졸업식에서 친일파 윤치호 교장이 상장과 함께 준 일본 군국주의를 합리화한 서적 <대동아공영권>을 그 자리에서 던지고 뛰쳐나온다. 이후 동주가 눈치를 보며 뒤따라 나오는 모습은 둘의 다른 행동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졸업 이후의 삶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동주는 몽규를 뒤따라가기에도 힘든 느낌이 강하다. 동주가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 것은 몽규의 제안 때문이었다. 같이 교토 제국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몽규는 합격하고 동주는 떨어진다. 일본에서 조선인들의 징집 명령에 몽규는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모임을 주도하지만, 동주는 끼이지도 못한다.
  국어 교과서 속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을 우리는 그의 내면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 배웠다. 영화 <동주>에서 관객들은 윤동주의 적극적이지 못했던 삶,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송몽규란 인물에게 느낀 열등감과 질투감으로 부끄러워했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영화 마지막, 동주는 진술서에 사인을 강요하는 일본 순사에게, 그러지 못해서 서명할 수 없다고 소리친다. 혐의가 억울해서가 아니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윤동주는 문서를 찢어버린다. 하지만 그가 정말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운 사람일까. 나라를 팔아먹고, 그 수혜로 떵떵거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동시대에 존재했지만 그들은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갔다. 끝까지 괴로워했던 윤동주에게 영화 속 정지용 시인의 말을 빌려 위로를 건네고 싶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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