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오페라단 이소영(음악학 85) 단장

 

 

 솔오페라단 이소영 단장은 올해 제 13회 ‘자랑스러운 부산대인’에 선정됐다. 개교 70주년에 선정된 만큼, 학교에게나 이소영 단장에게나 의미가 크다. 솔오페라단 사무실 단상의 수많은 트로피 중 당당하게 자리 잡은 ‘자랑스러운 부산대인’ 상패가 이 단장의 애정을 드러내는 듯했다.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 먹은 후에도 오페라단의 단장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단장은 소극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음악에 대한 애정이 지금의 이 단장을 만들었다.
물론 그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베르나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복수 전공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치열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그의 별명이 자칭 ‘이태리 북부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여자’였다고 한다. 2005년 부산에서 오페라단을 시작해, 국내외로 인정받기 까지 그에게 수많은 도전이 있었다. 외국 작품에 한국의 색을 입히고, 한국의 오페라가 가진 경쟁력에 대해 고민한 끝에 솔오페라단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현재는 부산과 서울에 뿌리를 두고, 국내 오페라를 넘어 세계의 무대에도 도전하는 오페라단으로 성장했다.

△요즘 어떤 일을 하나?
지난 6월에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11월 말 예술의 전당과 부산에서 하는 베르디 3대 오페라 중 하나인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공연을 준비하면서 바쁘게 보내고 있다.

△‘자랑스러운 효원인’에 선정된 소감은 어떤가.
졸업한 뒤 만난 부산대 동문들은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분들에 비하면 ‘자랑스러운 효원인 상을 받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지금까지 잘해서 주는 상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더 잘하라고 격려하기 위한 상이라 생각한다.

△부산대는 어떤 의미인가?
처음 부산대에 입학했을 때에는 우리 집이 파산을 한 상태여서 입시부터 시작해 졸업하기 까지 순탄치 않았다. 피아노 연습을 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학교에서 연습하고, 새벽에 나가야 했고, 아르바이트에 정말 쉼 없이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음악관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하기 위해 불을 끄고 피아노를 치면서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3학년이 되어서야 전철이 생겼는데, 밤늦게 음악관에서 전철역까지 내려가던 길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기를 대학생 때 보냈지만 그 시기가 있었기에 이후에 있었던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오페라단에서 단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무대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것 빼고는 다 한다고 보면 된다. 기획 단계에서 작품을 선정하고, 어떤 극장과 협업을 할지 정한다. 올해 11월과 12월에 공연할 오페라는 베네치아 국립극장과 빠르마 왕립극장과 협업을 한다. 가수 캐스팅, 무대 디자인, 의상 등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홍보와 마켓팅의 업무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심지어 자막까지 검토하고, 무대에 올릴 작품을 번역하기도 한다.

△오페라단을 운영하는 발판은 무엇이었나?
음악을 좋아했다. 학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원래는 성악가가 꿈이어서 유학을 가서는 성악을 전공했다. 학교를 다니다 보니 피아노도 더 배우고 싶어서 복수 전공을 했다. 국내로 돌아와서는 부산대에서 강의하고, 뮤지컬도 하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과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두 번, 세 번 공연을 하게 됐다. 첫 공연에는 이름도 올리지 않고 활동했는데, 계속 공연을 하다 보니 모두 단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등 떠밀려서 하게 됐다(웃음). 그 전에는 내성적이고, 까칠한 내가 단장이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이 용기를 줬다.

△부산에서 오페라를 시작할 때는 어땠나.
오페라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협업해야 된다. 협업의 중심에 단장이 있어야 했기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부산에서 질 좋은 공연을 올렸지만 계속해서 수억 원의 적자가 났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부산에서 계속 오페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작품을 올릴 때 받았던 격려가 컸던 것 같다. 첫 공연을 했을 때 부산대 교수님 한 분이 3일 내내 방문해 눈물을 흘리셨다. ‘부산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지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부산문화회관에서 문화회관 개관20주년 기념공연을 의뢰받아 아이다 공연을 했

 

고, 그 공연이 금상을 수상했었다. 힘든 순간마다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힘든 시기는 어떻게 이겨냈나.
언젠가 왜 돈이 되지 않는 오페라를 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모두가 돈이 되는 것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음악을 공부하면서 꿈꾸었던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2008년이 지나면서 적자가 나던 것이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아리러니하게도 서울에서 공연을 시작한 뒤부터였다. 서울에서의 공연이 전좌석 매진되기 시작하면서 서울의 수입을 통해 부산의 적자를 메우는 식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나에게 부산을 포기하고, 서울에 전념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체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처음 부산에서 오페라를 시작할 때 ‘메이드 인 부산’이 컨셉이었다.
우리 오페라단 이름이 솔오페라단인데, 솔은 태양(Solar)을 의미한다. 우리 오페라단이 중심이 되겠다는 포부를 담았기 때문에 정체성이 담긴 부산과의 연계성은 더욱 중요했다. 유학할 때도 부산대학 출신의 훌륭한 졸업생이 많았지만, 유학생 사회에서는 알게 모르게 서울과 지방이라는 선으로 나눠진 듯 했다. 부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오페라단을 운영하면서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해외 극장들과 협업을 통해서 외국작품을 들여오지만, 한국의 색깔을 입히려고 노력한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1500년대에 형성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오페라 역사는 70년 정도다. 이탈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페라의 역사가 짧지만 우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작품을 올릴 때 한국의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우리의 IT 기술을 통해서 홀로그램이나 미디어 파사드 등을 작품에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콘텐츠 중에서는 세계인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도 많다. 오페라를 통해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성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번에 무대에 올렸던 춘향전은 토스카나와 비슷하고, 내년에 올릴 선덕여왕은 아이다와 같다. 그렇기에 세계에서도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오페라단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오페라단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직원들도 함께 성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솔오페라단의 2대, 3대 단장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원들과 공유하는 가치나 함께 하는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은 오페라를 많이 봐야 좋은 오페라를 기획할 수 있다고 생각해 직원들의 공연 관람을 지원한다. 해외 극장과의 협업이 중요한 만큼, 일주일에 이틀은 영어, 3일은 이탈리아어를 함께 공부하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기악이든 성악이든 원한다면 이를 지원해줄 교수진이 부산대에도 있다. 쉽게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다. 또한, 음악에서도 분야가 굉장히 다양하다. 기악이나 성악을 전공했다고 해서 모두 성악가나 바이올린이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는 무대장치 분야가 발달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공부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도 많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시야를 넓히는 것을 추천해주고 싶다.
현재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고, ‘세상 속의 나를 보지 말고, 내 안의 세상을 봐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세상 속에 있는 초라한 자신을 보지 말고 자신 안에는 있는 끝없는 세계를 보면 좋겠다. 그걸 바라보고 끊임없이 꿈꾸고 도전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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