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부터인가 우리의 삶은 ‘자기 입증’으로 채워지고 있다.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정언명령 아래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청년들 역시 이런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각종 점수와 대외 활동 경력을 남부럽지 않게 쌓아야 하며, 이렇게 쌓아온 스펙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들 사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사망 선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 담담히 사망 선고를 받아들이는, 아니 자발적으로 ‘사망 상태’를 영위하는 청춘들이 있다.
영화 <경복>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두 친구가 등장한다. 막 ‘수험생 생활’을 끝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삶은 실로 단조롭기 그지없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과 뒤엉켜 있거나, 채팅을 하며 이성에 추근대기도 한다. 그들의 행위에는 어떤 거창한 이유나 목적이 없다. 그저 끌리는 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을 뿐이다. 동환(김동환 분)은 계속해서 기타를 친다.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로 노래도 부른다. 굳이 음악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언제부터 음악을 하게 됐냐는 질문에는 “그냥 얼마 전부터”라고 대답할 뿐이다. 형근(최시형 분)은 계속 무언가를 끄적거린다. 의미 없는 낙서도 있고, 여행을 떠난 엄마에게 전하는 편지도 있다.
이들처럼 글을 쓰고 음악을 한다는 것은 사회 기성의 시각에서는 비경제적이고 무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적 성공이 삶의 최우선 가치인 이들에게 글과 음악은 시쳇말로 하등 생활세계에 도움 안 되는 ‘뻘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친구는 자신의 행위와 꿈에 대해 너무나도 당당하다. 꿈을 합리화하려는 거창한 말의 잔치도 저 멀리 내다 버린 지 오래다. 편지를 적던 형근은 동환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다. 이에 기타를 치던 동환의 ‘음악’이라는 대답. 형근은 “아니 너 말고 나”라며 질문을 바로잡는다. 그러자 동환의 쓸쓸한 외침, “내가 어떻게 알아? 너가 알아서 해야지”. 이것은 마치 두 ‘뻘짓’하는 청년들의 ‘이유는 없어.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하는 거야’라는 사자후로 전해진다.
두 친구는 월세방을 얻기 위해 형근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슈퍼의 셋방을 몰래 팔아 자금을 마련하려 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다. 곧 셋방에 입주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찾아온다. △안 되는 시나리오를 부여잡고 사는 남자(허정 분)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마련하려고 하는 대학생 여자(한예리 분) △15년간 음악을 해왔다며 동환에게 음악에 대해 캐묻는 남자(이종필 분)가 그들이다. 이들은 어찌 보면 형근과 동환의 막연한 꿈이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는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형근의 꿈 △음악 하는 남자는 기타를 치는 동환의 이상향 △대학생 여자는 두 친구가 가장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정표인 것이다. 하지만 셋방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오는 이들은 모두 방값을 깎기 위해 비굴하게 부탁을 해야 할 정도로 곤궁한 처지다. 이런 모습을 통해 형근과 동환은 자신들의 미래를 보겠지만, 한없이 담담하기만 하다. 비록 겉으로는 비굴하고 시시할지라도, 표류하는 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엔딩에서 두 친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어 영화는 “그리고 우리는 좋은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라는 형근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에게 권태롭기 그지없던 이 시절은 ‘좋은’이라는 형용사로 인식된다. 영화의 제목도 크고 경사스러운 복을 일컫는 경복(慶福)이다. 뚜렷한 꿈이 없어 방황할지라도, 남이 정해준 목표나 방향점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는 삶이 그들에겐 복이었던 것이 아닐까? 

꿈을 찾는 방황, <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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