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삐걱거리는 상황을 처음 느껴보았다. 지난달 중순이었는데, 당시 높은 층에 있고 늦은 시간이어서, 건물이 흔들리는 그 순간 어떻게 하고 어디로 피해야 할지 무척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지진은 가라앉았지만, 항상 그 모습 그대로 든든히 나의 설 곳을 지탱해주어야 할 대지가 흔들리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때는 또 언제일까. 푸르른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서 이런 언급이 송구스럽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마냥 그 자리에 늘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닥이 깡그리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때는, 바로 언제나 우리의 테두리가 되어 주실 것만 같았던 부모님께 큰 사고가 있는 경우라고들 말한다. 굳이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가깝게 지내고 늘 곁에 함께하는 대상에 관련한 갑작스러운 소식은 참으로 마음을 깊이 뒤흔드는 것 같다.
설 곳이 흔들리고, 바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 만일 그러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 그리 절망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그러한 기분은 우리에게 많은 배움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텅 빈 공간에서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낭패를 겪는 감정, 그 다급하고도 막막한 감정은 가슴을 철렁거리게 한다. 다행히 일시적인 사태여서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회복된다 하여도, 지금 서 있는 바닥이 항상 그렇게 단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은 이미 팬 자국으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감정을 성급히 덮어두지 말고 조금만 진전시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 그리고 삶이 얼마나 많은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우리가 그 확실성을 결단코 보장받을 수 없는 바탕들에 기초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그러한 믿음이나 바탕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뒤틀리고 찢겨나갈 수 있는지를 관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감정을 다른 측면으로 전개하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뜬금없이, 난데없이 주어지는 이 삶의 균열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가만히 따져보면 우리 뜻대로, 오로지 내 마음대로 온전히 실행하고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언제 변화할지 모르는 조건들에 기대어 내 발 하나 내딛는 게 고작일 뿐이다.
자, 이렇게 벌어진 그러한 감정의 여파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우리 각자의 삶을 둘러싼 많은 영역이 항상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거부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사실을 품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적어도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서 있는 판보다 조금 더 안전할 것 같은 판을 나의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찾아 나서거나, 아니면 지금 서 있는 판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안전성을 개선하고 돌보고 소중하게 가꿔나가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아니면 두 선택을 종합해보려 애쓰든 그건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심코 있다가 도둑같이 불시에 찾아오는 흔들림에 망연자실 몸을 내맡기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윤재웅 (철학 석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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