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일본 만화를 열심히 봤던 때가 있었다. 그 중 <드래곤볼>은 전 우주와 사후 세계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스케일과 상대방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스카우터라는 장치로 인해 특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2012년 스카우터를 닮은 구글 글라스가 등장하자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글 글라스는 적당한 활용처를 찾지 못하면서 최근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이처럼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는데 웨어러블 AR(증강현실)기기인 스카우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장치의 가치가 휴대성이 아니라 측정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스카우터는 병법의 기본인 ‘지피지기’를 실현한 놀라운 측정 장치인 것이다.

  자연에서 생존을 위해 상대방의 전투력 측정이 선행되듯이 문명도 측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시간을 재고, 길이와 무게를 잴 수 있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사회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초기 농경 사회에서는 절기만 알아도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대양 항해를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과 천체의 고도가 필요했고, 향상된 천체 관측기술과 정확한 시계 덕분에 대항해 시대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농경사회에서 도시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거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표준화된 방법으로 무게를 측정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기차가 등장해 이동속도가 빨라지자 기술자들은 시간을 쪼개 분(minute) 단위로 세상을 움직였다. 표준시를 나타내는 기차역 앞의 커다란 시계나 시간표 등은 기차의 등장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과거에는 급하게 해야 할 일을 촌각(寸刻) 다투며 처리했지만 이제는 서버시간을 다투며 처리해야 한다. 촌각은 1각(15분)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인 1분 30초를 말하는데, 수강신청을 위해서는 초(second)를 쪼갠 서버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측정방법이 복잡해져 이제는 1초의 정의를 이해하기도 힘들어졌다. 흔히 알고 있는 1초는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간을 측정해 구한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이젠 아니다. 1967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수 천 년 간 사용하던 태양시를 원자시로 그 기준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1초는 세슘 133원자(133 Cs)의 바닥상태에 있는 두 초미세 준위 간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선의 9,192,631,770주기의 지속시간’이다. 원자시의 정의가 너무 복잡해 물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1초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힘들어졌다.
  측정방법이 복잡해지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달을 위해 더욱 정학한 측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측정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세종은 이천과 장영실에게 정확한 시계를 만들라고 했고, 박연에게는 편경을 정비하라고 명했다. 측정을 기본으로 하여 격물(格物)을 장려한 덕에 세종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할 수 있었다. 정도전이 그렸던 세상, 세종이 꿈꾸던 나라 모두 정확한 측정을 토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이 저울을 들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공정한 판단을 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많은 탐관오리들이 저울을 속여 힘없는 백성을 수탈했기에 정확한 저울이 판단의 기본이 된 것이다.   
  과일의 맛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데는 브릭스(Brix), 소음이 얼마나 큰지는 데시벨(dB) 단위로 측정해 판단한다. 심지어 죽고 사는 문제까지도 확률로 측정해 보험금을 산출한다. 우리 주변에 측정과 관계없는 것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측정해야 하고, 측정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측정할 수도 없고, 절대 측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깊이를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절대적 수치로 표현할 방법은 없다. 뇌의 비밀이 완전히 밝혀져 사랑을 측정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걸 묻어둬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랑이 거짓말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진화한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이렇게 보면 자신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방해하기 위해 선거철만 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들은 진정한 애국(愛國)자일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국민을 사랑하면 그 많은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 하겠는가?
 
최원석 과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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