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851년, 신라 문성왕 13년, 정부는 역사가들에게 두고두고 유감으로 남을 한 가지 조치를 시행했다. 828년에 장보고에 의해 수립되어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서 찬란한 역사를 이끌었던 남해의 무역기지, 청해진을 폐쇄한 것이다.

  당시의 신라 조정이 일종의 변덕으로 폐쇄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장보고는 해상에서 얻은 세력을 바탕으로 육지에까지 손을 대려 했으며, 왕권 다툼에 끼어들었다가 신라 최상층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끝내 왕은 그에게 자객 염장을 보냈으며, 장보고가 죽은 뒤 청해진은 폐쇄되고 주민은 육지로 옮겨졌다.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평가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청해진이 누렸던 영광에 필적할 만한 무역 허브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한반도는 기본적으로 내륙 국가의 성격을 띠어가게 된다.
  다시 1510년, 조선 중종 5년, 또 하나의 역사적인 폐쇄 조치가 있었다. 삼포(三浦), 즉 부산포, 내이포, 염포에 설치되어 있던 왜인들의 무역 공간이자 생활공간인 왜관(倭館), 말하자면 ‘재팬 타운’이 폐쇄된 것이다. 그것은 그해 벌어진 삼포왜란에 따른 보복 조치였다. 왜구는 고려 시대부터 꾸준히 우리나라를 괴롭혀 왔는데, 그것은 해적질과 사무역이 결합된 형태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정된 교역 장소를 허가해 주고 그 안에서 합법적으로 교역할 수 있게 해주면 왜구가 수그러들지 않을까? 이런 발상에 따라 1407년(태종 7년)에 처음 왜관을 설치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하여 운영해 왔다. 그러나 왜인 거주자가 점점 늘어나고 이들이 인근에 미치는 피해도 늘어서, 사회문제로 거론되었다. 세종이 대마도 정벌 이후 왜관을 폐쇄했다가 다시 열어주려 하자 이조판서 허조가 “어찌 물고기나 조개 같은 무리들을 우리 백성 사이에 살도록 하십니까” 하고 간언하였으며, 이후에도 삼포를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성종 대의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얼룩덜룩한 옷이 여러 읍에 득실거리며 우리 백성과 다투는 일이 많다. 몰래 전라도로 가서 행패를 부리는 자들은 모두 삼포의 사람이다”라며 폐쇄 아니면 강력한 규제가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왜인들에 대한 규제가 까다로워지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삼포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부산포 첨사 이우증과 병사, 백성 272명이 살해되었고, 왜인 쪽에서도 대마도주의 아들 종성홍 등 다수가 사망했다. 이런 일까지 있고 나니 자연스레 삼포는 폐지되었다. 그래도 우리 조정에 대한 간청과 압력이 계속되었으므로 2년 뒤에 제포 하나만을 다시 열었으나 규제는 엄격했다. 특히 거주 왜인들이 사적으로는 물론 공적으로도 왜관 밖을 벗어나지 못하게 엄중히 차단했다. 왜관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도 폐쇄와 재개를 반복하며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으나, 삼포왜란 이전처럼 북적거리는 재팬 타운의 모습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조정에서 삼포 폐쇄 조치에 대해 반론은 전무했다. 오랜 골칫거리가 무력 도발까지 자행했으니 당연한 조치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깝게는 대마도가 조선 조정에 대해 충성심을 완전히 잃어버려 임진왜란에서 기대되던 절충 역할을 외면하도록 했으며, 멀게는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면서 난학(蘭學)을 일으키고 세상에 대해 좀 더 넓은 시각을 기르는 동안 조선은 성리학과 중국 중심적 세계관에만 머무르도록 했다. 왜관을 제거해야 할, 또는 어쩔 수 없이 눈감아주는 야만의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이웃 나라와 평화를 다지고 바깥세상과 교류하는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청해진 폐쇄도 삼포 폐쇄도 당시로써는 이유가 타당한 조치였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보자면 아쉬움이 남는 조치이기도 했다. 오늘날 15년 동안 유지해온 유일한 대북 창구이자 ‘작은 통일의 공간’이었던 개성공단이 잘못하면 영영 폐쇄될 상황을 보며,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함규진 역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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