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국가폭력이 일어났다. 거센 물대포를 맞은 한 노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와 식용유, 색소탄 등이 시민들을 향해 발사됐다.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 저항하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뒤섞여 대회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것은 얼마 전 있었던 민중총궐기 대회의 현장이다.
국가폭력은 독재정권이 집권하던 시절에나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2015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되풀이 되고 있는 국가폭력. 발생 원인과 피해자들의 현실에 대해 짚어봤다. 

세상에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발생되는 폭력이 너무나도 많다. 폭행부터 살인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국가폭력이 한 번 일어나면, 형법상 범죄에 해당할 수 있는 폭행, 상해, 치사, 살인 등 상당 규모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70~1980년대 독재 시대에는 시민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등의 가혹행위가 심심찮게 일어났으며, 민주화 운동 등의 시위에는 무장한 군인이 과잉 진압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폭력 사태의 가해자가 다름 아닌 국가의 녹을 먹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인, 공무원 및 이에 준하는 자로서 자신의 권력과 이익 등을 취하기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짓누르며 심지어는 폭력까지 행사한다. ‘국가’라는 명목을 앞세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질서 유지, 공공복리, 국가 안보 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한 국가폭력
국가폭력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계속 함께 했다. 우리나라의 암흑기라 불리는 독재 정권 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수많은 폭력들이 가해졌다. 대표적으로 △제주 4·3사건 △4·19 혁명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이 있다. 4·19 혁명의 경우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강경 진압한 사례로 꼽힌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개표조작을 하게 된다.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를 탄압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치안 및 사법권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후 사태는 시위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의 사격전으로 번지게 되고 상황은 극악으로 치닫게 된다. 당시 사망자는 185명, 부상자는 1,500여명에 달했다. 이들 모두 이익을 취하기 위해 휘두른 국가폭력에 피해를 입은 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황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속 국가폭력이 함께한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기에는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항쟁 등의 사건에서 국가폭력이 일어났다. 독재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국가폭력은 계속됐다. 1991년 시위진압 도중 대학생을 때려 숨지게 한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2005년에는 용산참사, 2006년에는 대추리 사태가 있었다. 이처럼 국가폭력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등장하며 사회를 긴장감으로 물들여왔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무죄?
지배층이 국가 폭력을 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지배층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다. 폭력은 이 과정을 조금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이뤄지기도 한다.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 교수는 <대한민국 잔혹사>를 출간하면서 ‘한 사람을 패서 열 사람을 복종시키는 게 폭력의 효과’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 집단에게 가한 폭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70~1980년대 학기 초를 상상해봤을 때, 조용하던 학생들은 1주일이 지나면 떠들기 시작한다. 그때 선생님이 한 학생을 지목해 앞으로 부른다. 교사가 학생을 패는 일이 흔했던 당시, 한 학생을 무자비하게 때리면 나머지 학생은 얌전해졌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한 번의 폭력으로 1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리는 5·18 광주민주항쟁에 적용됐다. 당시 각계각층의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 등을 강력히 요구하며 신군부 세력을 비난했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계엄령을 발포하여 민주화세력과 노동자계급을 본격적으로 제압하려 했다. 광주민중의 저항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여 본보기로 삼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도 국가폭력 가해자들은 제대로 된 심판을 받지 않고 있다. 실제로 1948년 제주 4·3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한국 경찰과 군부는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의 가해자 중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관련 지휘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재판에 회부조차 된 사람은 거의 없다. 설사 재판에 넘어가더라도 권력자들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한다. 대체로 말단 혹은 중간 관리자의 실수로 미루거나 잘못된 일처리 때문이라며 변명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국가위기 등 급박하고 불가피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한다. 또한 국가폭력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아, 현재까지도 정·재계에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많다. 이것은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를 덮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범죄 현장의 증거들을 수시로 파기하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사기관·사법부·정치권·언론이 강자인 가해자 측의 입장에 선다. 검사들은 권력의 입맛에 따라 기소를 하거나 기소를 포기하고 피해자들에게 결정적 증거를 요구한다. 결국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진정한 사과 없이 얼마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죄를 덮으려고만 하는 것이다. 1980년에 일어난 5·18광주민주항쟁의 가해자들을 처벌하려던 시도가 이런 식으로 묻혀버렸다. 1997년 노태우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6명의 지휘관들이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 △반란죄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2년 만에 사면됐다.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은 여전히 국가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주먹구구식 진상 규명, 해결책은 어디에
수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한 국가폭력. 피해자는 속출했고 그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상 규명과 피해자를 위한 해결책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사건 파악은 물론 피해정도조차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의 움직임도 있었다. 2004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 다수 관련사 과거 법정위원회가 활동하면서 진실 규명에 탄력을 받는 듯 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2010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마저 해산되는 등 관련 기관들이 와해됐다. 이후 과거사 정리 사업을 이어나갈 뚜렷한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상 규명 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점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의 내용을 살피는 것이다. 현재도 가해자 혹은 관련자들이 권력을 누리며 진상규명을 방해할 수 있고, 당시의 시대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둥의 변명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실태 조사가 이뤄진 이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 독일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전범자에게 엄격하게 법을 집행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집행 초반에는 나치의 전범 재판과정에서 무분별한 처벌이 진행되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혼란을 빚은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나치즘 및 군국주의청산법>을 통해 보다 세분화된 방법으로 처벌을 시도했다. 8세 이상 독일 국민을 대상으로 나치 관련 혐의를 조사해 △주범 △중범 △경범 △단순협력 △무죄의 다섯 등급으로 판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수용소 감금, 직업 활동의 제약,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취했다. 심지어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이들은 해당 기간 동안 소유자, 동업자, 이사, 사업체 경영자로서 활동이 금지되었고, 교사, 종교인, 출판인, 작가 등의 일도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법적 처벌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행정적 차원에서의 실천도 필요하다, 최근에는 대만의 도시 가오슝시가 국가폭력을 아픔을 딛고 인권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한 때 대만성 출신 주민은 2·28 사건 이래 숱한 투쟁에 나섰고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2·28 사건은 1947년 2월 28일 중화민국 정부 관료의 폭압에 맞서 대만의 다수 주민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가오슝시는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12월을 인권의 달로 정하고 △인권백서 발간 △인권학당 설립 △인권상 제정 △인권보도상 선정 △국제토론회 개최 등으로 인권 문화를 확산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인권도서 출판과 강연을 장려하는 등 인권 사업의 범위도 확대했다. 국가폭력으로 추락한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시에서 자체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재원 확보를 통한 충분한 배상, 정신적 충격에 대한 상담과 치유를 효율적이고 장기적으로 실시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국정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진지하게 지난 국가권력자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복이 이뤄질 때 사회는 보다 건강해지고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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