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테러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각국은 주요 상징물에 삼색의 조명을 비췄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의 프랑스 국기를 나타낸 것이다. 지난 13일 IS(이슬람국가)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테러 공격을 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 10만 명의 인파가 모였고, 강경한 집회 진압이 있었다.
광우병 집회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 시위대는 11대 영역에 걸쳐 22개의 안을 제시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노동 개혁,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 등이 포함됐다. 경찰이 광화문 광장을 700여 대의 버스로 봉쇄했고, 시위대가 차벽을 뚫으려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경찰이 행사한 공권력의 정당성, 시위대의 폭력성이 논의의 주를 이루고 있다. 요구안보다는 시위 과정에 대한 논의가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위법성과 폭력성은 논란이 된다. 유모차와 함께 강남역에서 세월호 인양을 요구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평화적 집회를 했다. 하지만 보수단체는 “아직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위험한’ 시위 현장에 데리고 나온 것은 아동폭력”이라며 여성들을 고발했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집회는 위험과 불안을 조장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조·중·동에서는 시위대의 폭력적인 모습을 부각했다. 하지만 시위대의 일부가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해서 그 광장에 모인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중·동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범한’ 시민이 아니고, 특정한 (종북)세력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했다. 집회 참석자를 소수자로 규정함으로써 요구안도 소수만이 지지한다고 호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정치권은 시위대가 제시한 안이 국정 전반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사안이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정 전반에 대해 지적한 것은 국정을 잘못 운영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여야의 깊은 반성과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은 민중총궐기대회를 보수 세력을 집결시키는 정치적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있다.
정부는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에 대한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 대신 시위대의 물리적 폭력을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만 내비쳤다. 시작은 누구였건 간에 폭력에는 폭력으로 응수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다. 이는 IS의 파리 테러에 응수하는 프랑스 정부와 여러 국가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었다. 프랑스는 파리 테러 이후 계속해서 IS의 근거지가 있는 락까를 공습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폭력으로의 응수는 악순환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의 락까에 대한 폭격이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의 반감을 사 결집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무차별적인 테러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공권력이든, 방어를 위한 폭력이든,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정당성은 사라지고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이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전쟁으로 해결된 갈등은 없었다.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광장에 왜 사람들이 모였는지에 대해 본질적으로 접근한다면, 집회에서 그토록 폭력이 난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언론의 프레임과 여론을 반영하지 못한 정치에 항의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뭉치지 않으면 해결되는 일이 없었고, 그곳 광장에서 사회는 변했다. 시민들은 그 변화의 힘을 믿었을 것이다. 연쇄적 테러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파리의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했다. 시민들이 함께 모여 전쟁으로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상기했기에 이 가치는 더욱 빛났다. 파리의 애도 현장에서 시민들은 “우리의 사랑은 당신들의 증오보다 강하다”를 외쳤다. 갈등의 현장에서도 폭력 대신 인류애로 접근해야 갈등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에서 시작한다. 지금이 근본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을 되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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