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왕따를 당했는데 그때  주동자가 내 부하 직원으로 왔다”, “카페에서 진상을 부리던 아줌마한테 호통을 치고 왔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의 경험담, 그 중에서도 앞의 이야기처럼 언짢거나 답답한 상황이 통쾌하게 풀어졌을 때 우리는 ‘사이다’라고 한다. 텁텁하고 꽉 막힌 목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사이다처럼 우리가 마주한 일상에서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누군가 나서서 단번에 해결했을 때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사이다’가 함축하는 의미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착한 주인공이 나쁜 악당들을 물리치는 권선징악형 스토리는 문화예술의 클리셰였다. <홍길동전>, <흥부전>, <신데렐라> 이야기는 이를테면 우리 조상님들의 사이다였고, 고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진통제였다.
  더 나아가 신조어로서 사이다성 글은 시비를 가리고 악을 심판하여 정의 구현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평소 느껴왔던 문제의식이나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누군가 대신 말이나 글로 명쾌하게 표현하였을 때에도 사이다라 부른다. 다분히 정치적이고 논란이 될 만한 사항이더라도, 심지어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상이 내포되어있더라도 그것은 사이다로서 생명력과 지지를 얻는다.
  여성혐오에 남성혐오로 맞불을 놓는 ‘메갈리아’가 대표적이다. 남성을 성적으로 조롱하고, 남성이 사회 기득권층이라 여성들을 억압한다는 등의 논리는 뿌리 깊은 여성차별에 시달려온 여성들에게 속 시원한 사이다라 부를 만하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지나친 남성혐오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분히 여성우월주의적인 폭력적이고 증오어린 주장만 비정상적으로 높은 공감을 받고 있다. 일상에서 은연중에 생각했던 문제의식, 자신을 괴롭히고 차별한 이들에 대해 파괴적이고 호전적으로 반격하는 메갈리아를 보며 쾌감과 만족감,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비단 메갈리아 뿐만이 아니라 많은 집단이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집단에 속한 다수가 소수의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주장에 환호하고 열광한다. 집단과 집단 간에는 멀어져만 가는데 내집단끼리는 자신들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한다. 사회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으니 나를 보듬어줄 품에 더 깊이 파고든다. 그러나 정신없이 힘들고 지친 현실에서 왜곡된 포근함을 안겨주는 커뮤니티는 역설적으로 사회혼란과 갈등을 조장할 뿐이다.  마주하는 사이다는 늘어나는데, 갈등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갈등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회현상이다. 그리고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어린이집 아이들도 사무실 회사원들도 온전한 소통이 답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소통은 결코 사이다가 될 수 없다. 소통은 오히려 퍽퍽한 고구마처럼 답답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따르고자 하기 마련이며, 집단 간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대화와 타협은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갈등을 폭력과 권위로 찍어 누르는 주인공만이 호쾌한 ‘사이다’는 그 순간만큼은 시원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하지 못한 채 입안에 찝찝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를 취하게 하는 사이다보다, 굳이 힘들여가며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집단 간의 관용과 양보로 모두가 훈훈하고 깔끔한 ‘숭늉’처럼 풀어내는 것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사회 갈등 해결의 실마리일 것이다.
최관영(경제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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