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진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정부는 좌파·민중·주체 사관으로 경도된 역사학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교과서 국정화를 기어이 밀어 붙였다. 학계와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발이야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지만 불온학자로 낙인찍힌 90% 이상의 역사 전공자와 교사에게 배우는 또는 조만간 배우게 될 어린 학생들까지도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의 국정화 방침에 성토를 가하고 있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역사서술을 둘러싼 전선은 정부-학계·시민단체·학생층으로 양분된 양상이다. 

  본래 역사학은 위정자(治者)의 학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곧잘 ‘역사는 곧 거울(鑑)’로 비유하곤 했다. 지배층들이 ‘비춰본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과거를 자기반성의 도구로 삼아 현실적 권력을 공고화하려 했던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찰을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일정한 비판이 전제되어야 했으므로 치자들은 역사 서술가의 자율권을 일정 부분이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전근대사회에서도 역사서술의 자율권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라고 해도 다를 바 없었다. 국민국가 형성은 동일한 공간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이 단일화된 정체성을 형성하여 국민으로 전화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국민 형성은 부국강병으로 가는 최적의 방략이었기에 ‘국민적 정체성’ 형성을 위한 도구로 역사는 다시금 부각되었다. 근대 학문의 옷을 걸치고 역사는 근대 역사학으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한편, 지배층은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와중에서 과거를 통제하여 권력의 영속화를 끊임없이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역사서술 기도는 번번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 이유는 자명했다. 근대란 자본주의와 아울러 민주주의가 대본(大本)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이 풍부해지면서 역사서술에 대한 국가의 입김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이지 우리에게 당면한 현 상황은 서구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경험했던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사회경제사를 기반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자학 사관으로 비난한 우파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힘을 얻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그래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서술이 좌파사관·자학 사관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서구 보수지식인들의 총공세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서술이란 본질적으로 아카데미즘이 담당해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위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구의 역사교과서가 이미 검인정을 넘어 자유발행제로 정착했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제하려는 시도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분단의 질곡으로 인하여 친일파 청산은 고사하고 ‘근대주의’ 신봉자들에 의해 반민족 행위자가 도리어 대한민국의 선각자로 칭해지는 언어도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있어 국민국가 형성은 여전한 숙제임을 말해주며 민주주의 기반이 그만큼 취약함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역사서술에 대한 정권 측의 통제와 이를 막으려는 집단 간의 힘겨루기는 지난할 것임을 예견한다. 그럼에도 이 싸움은 역사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 지향을 가르는 결정적 분수령이 될 수도 있기에 뜻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아울러 요청한다. “친일과 독재를 말하는 것이 좌파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 기꺼이 좌파가 되자”라는 한 페이스북 친구의 일갈을 새기면서 말이다.
이창섭(사학 박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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