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뚜껑을 열어젖히고 차가운 밤 빗속으로 뛰쳐나온 세자가 왕의 처소로 향한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다. 북소리와 경 읽는 소리, 노랫가락이 뒤섞인 배경음악이 격렬하게 휘몰아치자 스크린을 뚫고 나온 서늘한 광기가 객석에 번진다. 밝은 날, 왕은 간밤에 자신을 향했던 칼끝을 세자를 향해 돌려놓는다. “자결하라” 

거두절미하고 조선왕조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절정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사도>의 오프닝은 도전적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역사의 한 자락. 이준익 감독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스크린으로 불러오면서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대부분 삭제하고 보편적인 가족 드라마로 축소시키는 쪽을 택했다. 이때 “이는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라는 영조의 대사는 이 영화를 독해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지도가 된다.
<사도>에서 이준익 감독의 관심이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그는 참혹한 결과를 빚은 어느 부자(父子)의 마음 풍경을 다룬 가족 심리극을 의도했다. 그리하여 임오화변은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세대 갈등을 다룬 현대의 우화가 되었다. 관객들은 이 점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민적인 감정이입을 끌어낼 수 있었던 영리한 선택으로 본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나는 이 ‘과정’을 따라갔더니 그 ‘결과’를 납득할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의문으로 남겨진 여백을 채웠더니 명명백백한 결과가 도리어 의문에 붙여지는 아이러니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장차 왕이 될 아들을 뒤주에 가둬 말려 죽인 일을 ‘집안일’로 접근할 때, 가장 설명되지 않는 문제적 인간은 영조다.
이준익 감독의 도전적 선택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나는 그보다 연출의도를 초과하는 송강호의 변칙연기에 마음이 끌린다. <사도>에 대한 나의 양가적 입장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를테면 일곱 번째 날, 영조와 사도세자의 상상적 대화 신에서 송강호가 “미쳐서”라는 대사를 전대미문의 톤으로 소화할 때(소위 삑사리 난), 거기엔 영조의 심리적 분열이 숨겨져 있다. 지금 그는 아들을 “미쳐서 아버지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규정하지만 실은 그 사실을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듯하다. 혹은 미친 자는 바로 그 자신이다. 
여덟째 날, 영조는 뒤주 안으로 손을 넣어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코와 목덜미, 뺨으로 천천히 옮겨가며 숨결, 맥박, 온기를 확인하는 그의 손길은 침착하고 치밀하다. 감정적 동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아비의 손은, 기능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의 숨통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제 때에 그 사실을 확인하는 무정한 손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잔혹한 순간이다. 
감정적 동요는 그 직후에 찾아온다.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후 송강호는 영조의 감정적 붕괴를 대사를 모조리 뭉개는 것으로 구현해냈다. 대본을 지우면서 다르게 채워 넣는, 송강호의 이 기이한 연기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어린 딸을 잃고 무자비한 복수를 완수한 그가 무정부주의자들의 기습으로 자신의 심장에 꽂힌 칼을 내려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마지막 장면. 그때의 웅얼거림에는 아무런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부조리한 현실이 희미하게 반향될 뿐. 반면 <사도>의 웅얼거림은 의미로 포화상태에 이른다. 그런데 그 넘쳐나는 의미는 구체적인 언어로는 포획될 수 없는, 거의 정신 분열적인 반응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매우 심란한 느낌을 안긴다. 
그 자리에서 영조는 무슨 말을 했던가. 다수의 평자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은 일곱째 날의 대화 신(scene)이 결국은 영조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던 반면, 여덟째 날의 뭉개진 대사의 효과는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다.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짓을 저지른 자의 통한이 그를 가련하지만 동정할 수는 없는 동물로 만들었다. 이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껴안는 방식에 끝내 마음이 움직인다. 캐릭터 해석에서 연출이 실패하고, 연기가 구원한 순간. 나는 송강호의 변칙 연기가 이 ‘극단의 가족드라마’를 감정적으로 설복시키고 윤리적으로 구원했다고 믿는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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