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 일을 미루는 편이다. 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때쯤 시작해서 데드라인을 목전에 두고 완성을 하곤 한다. 왜 그때그때 해놓지 못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이번 주만 해도 해야 할 업무가 여러 개인데 며칠째 침대에 누워서 꼼짝 않고 있다. 침대에 누워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TV 리모컨을 돌리는 일. ‘10시부터 11시까지는 드라마를 봐야지, 11시에는 좋아하는 예능을 하니까 12시 30분부터 서류 작업 시작해야지’하고 야무진 계획을 짰지만... 새벽 3시까지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고야 말았다. 캐리 언니가 칼럼을 쓰는 동안 서류를 작성해야 했지만 캐리 언니가 안녕을 고하면 ‘언니 저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해야겠어요’ 인사를 하고 그제서야 TV를 끈다. 왜 하필이면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 <섹스 앤 더 시티>가 TV에 나오는 것일까?나만 캐리 언니의 마력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 시간에 <섹스 앤 더 시티>가 방영하는 건 우연일까, 그 일을 하기 싫어서 <섹스 앤 더 시티>를 찾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이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 반복임을 깨달았다. 스무 살 이후 내 노트북에는 항상 <섹스 앤 더 시티>의 전 시즌이 들어있었고 뭔가 풀리지 않을 땐 캐리 언니의 힘을 빌리곤 했다.
‘부정적인 결과가 펼쳐질 것을 알면서 자발적으로 일을 미루는 것’을 ‘미루기’라고 정의한다고 한다. 대개 할 일을 미루는 사람들이 완벽주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불안에 떨면서 시작을 못 한다고들 하는데 연구결과에 따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미루기가 완벽주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속이 약간 뜨끔했다. 여태껏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자료 조사와 구상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자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짧은 시간 안에 좋은 결과를 내기를 원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반발 심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캐리 언니는 내게 어떤 답을 던져 준걸까?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캐리 언니가 던져 준 교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동안,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기에 앞서, 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섹스 앤 더 시티>에 투자했다. 누군가에게는 담배를 피는 시간이, 화장실에서 멍때리는 시간이, 손톱을 깎는 시간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 같은 행위였다면 나에게는 <섹스 앤 더 시티>가 그 의식의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면 그 시간이 낭비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 시간들이 허투루 쓰였던 걸까?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한숨 내쉬는 시간,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시간들은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어제 <섹스 앤 더 시티> 에피소드 두 편만 보고 논문을 읽고 잤다. 어젯밤의 내가 대견스럽다. 토닥토닥. 때로는 한숨 돌리고 지내길!

 전혜인(사회적기업 석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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