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박사

 

  1977년 6월 16일, 미국 일리노이 주 인근 고속도로에서 타이어에 펑크가 난 대형 트럭이 승용차를 덮쳤다물리학계에서 ‘벤자민 리’로 통하던 이휘소 박사는 이 사고로 사망했다. 한 달 뒤인 7월 25일 미국의 저명한 학술잡지 <피지컬 리뷰 레터>에는 그와 스티븐 와인버그가 공동 발표한 〈무거운 중성미자 질량의 우주론적 하한선〉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훗날 암흑물질 연구에 활발히 응용되는 이 논문에는 저자 벤자민 리가 사망했다는 주석이 달려있었다.

  1935년 출생한 이휘소 박사는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전공이었던 화학보다 물리학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고, 물리학과로 전과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 참전 장교 부인회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 기회를 얻었고, 미국 마이애미 대학 물리학과에 편입해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이어 1961년, 불과 26세의 나이에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함과 함께 조교수로 임용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가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연구했던 곳으로 유명한 프리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됐다. 이후 그는 많은 대학과 연구소를 옮겨 다니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였다. 그의 사망 직전 직책은 페르미 연구소 이론 물리학 부장 겸 시카고 대학 교수였다.
  이휘소 박사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1973년 어니스트 에이버스와 함께 <게이지 이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게이지 이론의 확립에 영향을 미쳤다. 홍덕기(물리) 교수는 “소립자들의 결합과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표준이론이 게이지 이론”이라며 “이휘소 박사는 게이지 이론의 최초 증명자인 델트만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증명했다”고 전했다.
  또 1974년에 메리 가이아드,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발표한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은 참쿼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홍덕기 교수는 “참쿼크가 발견되기도 이전에 참쿼크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질량 범위를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논문이 프리프린트로 공개된 얼마 뒤인 그해 11월, 순수하게 참쿼크로 이뤄진 ‘제이/프시 중간자’가 발견됨에 따라 참쿼크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증명됐다.
  사실상 유작이 된 논문 〈무거운 중성미자 질량의 우주론적 하계〉이 가지는 의미도 크다. 그는 해당 논문에서 전기적으로 중성이며 다른 물질과의 작용이 거의 없는 무겁고 안정적인 입자를 ‘무거운 중성미자’(Heavy Neutrino)로 칭했다. 그리고 이것의 상호작용의 세기가 일반적인 중성미자와 비슷하다면 그 질량이 우주론적 하계인 2 GeV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00년에 발견된 타우 중성미자의 질량은 그의 예측보다 훨씬 적었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그가 말한 ‘무거운 중성미자’가 중성미자가 아닌 어떤 새로운 물질일 경우, 그의 예측이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새로운 물질이 바로 암흑물질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윔프(WIMP, 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이)다. 즉 이휘소 박사는 윔프의 개념을 최초로 제기함과 함께, 질량의 우주론적 하계도 리-와인버그 경계로 정리한 셈이다.
  그가 사망한지 두달 뒤, 한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1979년 전약이론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압두스 살람은 ‘그의 자리에 내가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는 수상소감을 남겼다. 2006년 이휘소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고, 그의 논문은 지금까지 14,000회 이상 인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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