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그리워한다. 당신에게 가지는 못하고 삶의 갈피갈피 숨 막혀 하며 당신을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시작되어 머무르고 있는지 나는 알면서 또 알지 못한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나름대로 알고 있었고 늘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는 편이었기에 당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제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당신 속에 감싸여 있는 어떤 세계, 나 역시 표현하고 있는 세계이긴 하지만 내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전부는 알 수 없을 그런 가능한 세계가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다시 한 번 돌아다보는 사랑이라는(김승희, <‘하물며’라는 말>)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세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세상 자체가 신기하다고 한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연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와 개인성을 부여하는 것이며(막스 셸러), 강신주가 김수영을 빌어 와 말하는 것처럼,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자 자유의 긍정이다.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그 뜨겁게 솟아나는 자유의 힘으로 자신이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어 감을 느끼고 아울러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김선우,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헤르만 브로흐의 지극히 아름다운 단편소설 <바르바라>에 그려진 것처럼, 사랑은 다른 자아의 무한한 신비가 나를 포용하는 것이며 이 세상 자체가 인간의 가슴속에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는 궁극의 시간이자 공간이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사랑하고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험난하다.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버젓이 사실로서 나날이 신문에 실리고 염치도 없이 세상에 파고들곤 한다. 사람들 역시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점점 좀비처럼 되어간다. 사랑은 사치이고 삶마저 거추장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이렇게 가혹하고 슬픈 세상에서 쭈그려 앉아 신발 끈을 묶을 때, 당신을 어떻게 사랑할까 싶어 등이 훅하고 꺾인다. 당신을 알아보고 온 존재로 떨림을 경험했던 나 스스로를 앞으로 어떻게 붙들 수 있을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너무나도 무력하여 가엾기 짝이 없는 이 사랑을 어찌해야 지킬 수 있을지, 종종 자신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사랑이 내게 가르쳐 준 대로 고집스럽게, 오로지 이 긍휼한 사랑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쥘리 마로, <파란색은 따뜻하다>), 사랑을 잃지 않는 것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다고(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믿는다. ‘낯선 곳을 사랑하는 여행자처럼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하네’라고 했던 한나 아렌트를 때때로 떠올리며, 이 징글징글한 세상이 우리 사랑의 지도가 되기를(헨리 밀러) 바라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열렬히 믿는다. 영화 <호빗: 뜻밖의 여정>에 나오는 대사처럼,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사랑이나 친절과 같은 사소한 행위들’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아낌없이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의 힘으로 폭발적인 혁명을 탄생시키기를 희구한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을 만나야 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마따나 사랑은 만남이라는 사건에 기인하는 까닭이다. 만남의 힘, 서로 만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 외에 아무것도 선행하지 않는 힘으로서, 어떤 잣대도 없다. 그 힘은 감정의 힘으로도, 육체의 성적인 힘, 욕망하는 힘으로도 측정될 수 없는 시작이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우리는 만날 것이다. 언제까지고 낯설 수 있을 당신, 영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를 당신, 어쩌면 만나고 싶지 않은 당신까지도 언제나 다시금 만날 것이다.
   
오정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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