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이 온전히 한 배우의 얼굴로 채워질 때 우리는 종종 거기서 인물의 영혼을 들여다본 듯한 인상을 얻는다. 얼굴에서 영혼을 읽는다? 그건 어쩌면 말 그대로 인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가시적인 것(얼굴)에서 비가시적인 어떤 것(영혼 혹은 내면)을 엿본 듯한 느낌은 영화라는 시각적 매체에 내재한 고유한 힘에서 비롯되었다(또 다른 시각예술인 회화는 피사체의 영혼보다 화가의 심상을 더 많이 반영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다르다) 이때 스크린 속의 배우들은 무방비하고 애매한 현실의 우리와 달리, ‘제대로 읽히길 원하는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는 존재들이다.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사람, 그 육체적 표피에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낼 수 있는 사람. 때때로 배우의 얼굴은 무언의 언어로 우리의 마음을 낚아챈다. 그것도 단숨에.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나이트 크롤러>에서 제이크 질렌할의 얼굴이 제시되는 첫 장면에서 숨을 훅 들이쉬었던 기억으로 시작하자. 그 얼굴은 마치 뱀 같았는데, 나쁜 기운을 뿜어내며 ‘이 인간과 상종하지 마라’는 무의식적인 신호를 보내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저 배우의 얼굴을 어떻게 한 거야?’  객석에서 이런 질문을 품었던 이가 나뿐이었을 리 없다.
  확실히 배우의 재능에는 미스터리한 측면이 있다. <언더 더 스킨>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은 아름다운 인간 표피를 뒤집어쓴 외계인의 텅 빈 영혼을 되 비추고 있었고, <위플래쉬>에서 J. K. 시몬스의 단호한 얼굴은 파쇼 선생의 뒤틀린 자기확신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폭스 캐처>에서 스티븐 가렐은 분장의 힘을 빌려 완전히 다른 인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인간미 넘치는 코미디 배우인 가렐의 얼굴에서 정감과 표정을 빼고 나이와 무감함을 더하여 재벌기업가에서 돌연 살인자로 정체성을 갈아치운 것이다. 그에 비하면 같은 영화에서 레슬러를 연기한 채닝 테이텀과 마크 러팔로의 얼굴은 덜 미스터리하지만 그렇다고 덜 극적인 것은 아니다. 테이텀의 비죽하게 나온 턱과 다물어지지 않은 입은 스포츠인의 우직함과 미성숙한 자아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고, 무성한 수염으로 뒤덮인 러팔로의 얼굴은 아무런 시각적 변형을 취하지 않고도 그 인물의 포용력과 성숙한 내면을 조용히 설득해냈다.            
  무엇보다 최근에 만난 가장 인상적인 얼굴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에 있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안성기라는 배우에게서 뭔가 다른 걸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너무나 친숙하고 지나치게 규범적이라는 점이 그 배우의 벽이었다. 50년이 넘는 경력 동안 모범답안 같은 삶을 꾸려온 60대 남자배우에게 임권택 감독은 대단한 연기변신 같은 걸 요청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그가 살아온 삶을 토대로 그 이면을 들춰 보이고자 했는데, 그 이면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껏 이 배우가 구축해놓은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건 임권택 감독의 말대로 “안성기라는 얼굴이 견디고 있는 것”, 즉 내면의 들끓는 열락의 욕망도 깊은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얼굴이 버텨준 덕분에 ‘연옥’­­­­을 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화장>에서 안성기는 대체 불가능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것이 배우의 얼굴인 것은 그 때문이다. 악당과의 혈전, 카체이스, 대폭발, 쓰나미, 허리케인, 우주전쟁 등 역사상 스크린에서 구현된 그 어떤 스펙터클도 배우의 얼굴보다 더 드라마틱한 구경거리는 되지 못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릴케는 일기체 소설인 <말테의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 실존의 중층적 본질을 환기하는 ‘한 사람에 여러 얼굴’ 이라는 릴케의 수사는 배우에게로 와서 하나의 실재가 된다. 무한대의 얼굴, 또 그만큼의 영혼, 그 총체로서의 인간, 그리고 세계. 스크린 위의 어떤 얼굴들은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하나의 거대한 신비다. 비약하자면, 얼굴이 곧 우주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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