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 중에 가장 매혹적인 악기를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 없이 드럼을 들고 싶다. 드럼은 타악기 중 다양한 감정의 폭을 재현 가능하며, 따라서 유일하게 오랜 시간 독주가 가능한 타악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의견이 연주가들이나 악기 전문가들의 비웃음이나 분노를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드럼 사랑을 최대한 충족시켜주는 영화가 최근 국내에 개봉되었다.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선보였던 화제의 영화 <위플래쉬>가 바로 그 영화이다. 필자도 지난주에 이 영화를 보았다. 투 탑으로 가면서 끝까지 관객을 긴장시키는 호연을 보여준 두 배우의 연기가 멋졌다. 그러나 극 중 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스타벅스 한정 판매 재즈 모음집’ 수준에 머무는 필자의 귀까지 더없이 기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흐르는 재즈 선율이었다. 거의 텅 빈 영화관 안에서-종영 날짜가 임박한 영화이고 평일 저녁이라- 듀크 엘링턴의 ‘카라반(Caravan)’의 매우 특별한 연주를 엄청난 사운드로 듣고 있자니, 마치 혼자서 재즈 클럽을 전세내고 있는 듯해서 너무나 흐뭇했었다. 

  한편 이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자유와 여유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던 재즈계가 ‘피 터지는’ 폭력이 난무하는 격투기 장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영화에서 멀쩡한 주인공의 정신 줄을 놓게 만드는 선생 플렛쳐를 보면 많은 폭력교사, 폭력상사, 폭력남편, 더 나아가 독재자들이 늘상 하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아프지? 근데 이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거야”. 주인공인 앤드류의 정신 상태도 선생 못지않게 변해간다. 공연장에서 선생과 멱살 잡고 싸우던 애가 나중에 조신하게 술 한 잔 앞에 두고 선생과 찰리 파커 얘기나 주고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 괴상한 재즈계의 사도마조히스틱한 브로맨스(?)가 왜 이토록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바로 예술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앤드류의 재즈에 대한 정열, 최고의 연주자가 되겠다는 갈망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돌아오는 반응은 늘 “그걸로 어떻게 먹고 살건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은 예술을 비롯하여 인문학의 효용도(?)에 대해 제기되는, 너절하고 지루한 노래의 후렴처럼 잊을만하면 다시 들리는 논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필자는 예술 그리고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잣대라고 생각한다. 즉각적인 재화와의 교환가치를 가치라고 본다면 예술과 인문학은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인류 문화의 긍정적 변화니 토대로서의 지식이니 하는 이야기를 해봐야 플렛쳐 선생의 광신적인 재즈사랑 보다도 더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이 우리 사회에 30년 후, 50년 후, 100년 후에 가져올 변화와 그 파장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이 변화를 재화로 굳이 환산해 본다면 그 가치는 있다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도 앤드류처럼 마음속에 숨겨둔 드럼을 치면서 미래를 기다리는 많은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강의실 안에서 혹은 강의실 밖에서 아니면 인생의 여정 어디에선가에서, 사회가 외면하는 자신의 꿈을 알아보고 길을 열어줄  “제 정신을 가진” 플랫쳐 선생님을 만나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들의 열정과 꿈을 소중히하고 뒷받침해주는 성숙한 공동체로 변할 수 있기를 더불어 빌어본다.
 
   
이송이(불어불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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