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간다. 며칠 전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위층에서 쿵쿵거리는 발걸음소리 때문에 깼고,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오히려 내 쪽에서,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단 말까지 여러 차례 하며 괴로움과 곤란함을 거의 호소했건만 나를 대하는 그쪽의 시선이며 표정이, 말이 도저히 안 통할 것임이 확연한지라 그 길로 이사를 결심했다. 얼마 전 이사 나간 그 전 사람들도 걸음이 조심스럽지는 않아서 우리 집에 앉아서도 위쪽 사람들의 동선이 자세히 파악되긴 했지만 아마도 곧 이사 들어 올 이번 사람들의 걸음소리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로 위아래층 사람들끼리 주먹다툼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 남 일 같지 않았고 솔직한 심정으로 완전범죄만 가능하다면 위층 문손잡이에 독이라도 발라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쪽 말로는 겨우 몇 걸음 걸었을 뿐이라는 그 발걸음소리가 무슨 산짐승이 움직이나 싶을 지경이고 남녀 두 명 다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여 공포심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떠나게 됐다. 건축가 승효상씨의 말마따나 ‘터무늬 없는’ 아파트 생활을 이참에 접게 된 것이지만, 학교 걸어다니며 동네 강아지가 찻길 건너는 모습 지켜보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밤늦게까지도 편하게 어울리고 아침이면 가까운 산에 가고, 저녁이면 온천천변 걷는 게 습관이자 낙이라면 낙이었는데 이제 그런 건 어렵게 되었다. 베란다 창에서 고개를 빼고 저 아래 세상을 구경하거나 지극히 철학적인 자태로 고요히 먼 산을 보곤 하는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도, 이제 안 된다고, 미안하다고, 그래도 사람 식구가 못 견디니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다. 간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다소는 감상적이 되어 여기서 생각한 사람, 헤맨 길들이 먹먹하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당신의 병이 깊은 걸 알고 내게 이 집을 장만해 주시고 단 한 번 오셔서는 볕 잘 드는 거실마루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눈으로 마음으로 그려진다.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와 나 사이의 이별 안에 있다
<정민아, ‘무엇이 되어’>

고 하더니, 누군가 떠나도 한 시절이 저물어도 그리움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별은 종료되는 게 아닌가 보다. 어쩌면 이는 죽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듯싶은데, 모리스 블랑쇼가 말한 대로, 그리고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이,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은 그 사람의 삶은 끝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들이 함께 있음을 일깨우는 일종의 사건이자 공동 존재를 실현하게 하는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사 가서 아마도 나는 또 나름대로 잘 지낼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역시 어쩌면 세월호 사건을 그저 사고로 눙치고서도 별 일 없었다는 듯 혹은 이미 다 지난 일이라 괜찮아졌다며 잘 지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여행자의 아내>에 나오는 대사처럼, 적어도 제대로 슬퍼하면서 잘 지내면 좋겠다. 우리의 존재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는 우리가 이 사건을 계기로 만날 수 있도록, 같이 사는 세상임을 느낄 수 있도록 어찌된 일인지 진상부터 제대로 규명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어디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엄두가 안 나더라도 심지어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더라도 그런 일이 생기게 만든 부조리한 구조 자체를 당연히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온 존재로 이별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해 봤던 이들이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렇게 제대로 책임을 다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그 변화를 실제로 보기까지 끈질기게 기다릴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웃는 남자>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야말로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지라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다.

오정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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