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자맹 콩스탕의 자유주의 : 고대인의 자유와 근대인의 자유 비교론

 

우리에게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 de Rebecque, 1767~1830)은 자전적인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전개한 심리소설 ‘아돌프’(Adolphe, 1815)로 알려져 있다. 최근 자유주의의 본성을 탐색하는 분위기가 증대하면서 그의 정치사상이 재평가 받고 있다.

 스위스 태생의 뱅자맹 콩스탕은 문학가 겸 정치 평론가로 알려져 있다(출처 wikimedia commons)

  콩스탕의 사상은 혁명과 독재와 왕정복고의 현실에서 동요하는 지식인의 모색을 표현한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도덕성이 결여된 테르미도르 반동의 권력을 옹호하면서 출발한 콩스탕의 정치이론은 현실에서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관철 시키려는 자유주의의 측면과, 공화정 자유국가 이념의 실현태로서 혁명을 긍정하는 공화주의의 측면이 교차한다. 이 과정에서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변형시킨 그는 체계적인 이념적 전망을 제시하기에는 미흡했지만 역설적으로 근대자유주의의 기본 속성들을 잘 표출해냈다. 그러나 당대 루이 보날 이나 조셉 드 메뜨르와 같은 보수주의자는 물론 제레미 벤덤 같은 공리주의적 자유주의자도 콩스탕을 일관성 없고 부도덕한 인물로 혹평했다. 콩스탕의 자유주의 역시 학자들마다 평가의 결이 조금씩 다르다. 콩스탕의 자유주의 이해에서 기본적인 준거는 ‘고대인의 자유와 비교한 근대인의 자유론’이며 이와 연관시켜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대한 비판이다. 아울러 근대인의 자유 옹호와 연관시켜 루소 식의 ‘의지’(will)가 아닌 ‘제도’를 통한 자유 실현 방도로서 대의제도론을 검토하는 의도의 해명이 필요하다. 20세기에 유명한 정치이론가 아이제이어 벌린은 자유를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로 분류하고 이 개념을 콩스탕의 자유 개념과 연관 시켜 통칭 벌린-콩스탕 명제가 성립했다. 그리고 20세기 말 프랑스대혁명 해석의 신정통으로 떠오른 프랑수아 퓌레는 혁명의 급진적 단계를 ‘일탈현상’으로 이해하고 대혁명과 공화주의적 자유주의를 일관되게 지지한 인물로 콩스탕을 부각시켰다.
 
콩스탕이 설명한 자유주의
 
 
  콩스탕이 자신의 정치원리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가장 선명한 틀은 ‘고대인의 자유와 근대인의 자유’에 대한 논의다. 고대인의 자유에 대한 논리적 이상화는 앙시엥 레짐기에 몽테스키외를 거쳐 루소에서 절정에 이르고 혁명가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실천됐다. 콩스탕은 고전공화정적 시민정신에 근거한 자유와 평등의 열망을 근대세계에 적용하려는 논리의 건강성을 비판했다. 이 비판은 매우 전략적인 사고행위였고 전술적으로는 루소의 인민주권론 비판으로 나타났다. 그는 혁명의 급진적 단계에서 평등주의적 구조가 공동체 수호를 명분으로 혁명적 독재에 기여하고, 총재정부의 의사(疑似)공화정적 정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정치불신과 개인주의가 결국 개인적 자유의 영역까지도 파괴함을 목격했다. 그리하여 1819년 파리의 왕립 ‘아테나움’에서 행한 ‘근대인의 자유와 비교한 고대인의 자유’ 강연에서 시민의 과도한 정치참여나 비참여 모두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양면적 통찰에 도달했다. 고전공화주의를 비판하고 근대공화주의를 모색하는 이 강연은 17세기 말에 시작된 ‘고대인파와 근대인파 논쟁’의 결정판이다.
 
 
독립성이 보장되는 
고대인의 자유
 
  콩스탕이 설명한 고대인의 자유는 사회적 권력의 행사에 ‘시민의 최대한의 참여’를, 근대인의 자유는 정부로부터 ‘시민의 독립성’ 보장에 있다. 전자는 ‘투표’하고 ‘판결’을 표명하는 주권행사로 구성되고 후자는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 또는 처형되지 않으며’, 어떤 개인(들)의 자의적 의지가 관철되는 지배하에 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자유주의 전통은 선험적인 자연법과 자연권에 바탕을 둔 영국적 전통과, 상업사회의 성장과 개인주의의 발전에 적합한 근대의 정부는 법치에 바탕을 둔 제한정부라고 강조하는 프랑스적 전통이 맞물려 발전해 왔다. 프랑스적 전통의 장점은 정치적 규정을 사회변화이론에 근거함으로써, 규범적 논증에 집착하는 영국적 전통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점이다. 콩스탕을 비롯한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자연법의 원리를 따른 쟈코뱅파의 급진정치와 왕당파의 과격한 반동이 모두 물질적·문화적 조건이 크게 달라진 근대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콩스탕이 묘사한 근대국민국가
 
  콩스탕에게 고전공화정은 각 개인의 사회적 생존이 정치적 생존과 결합되어 인간의 지위가 정치적 영역에서 결정되는 비교적 동질적인 사회였다. 국가정치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이 결여된 고전공화정에는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도 없고 개인은 오직 정치적 영역에 무한정 복종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한편 아테네에서는 상업의 정신과 그에 따른 개인의 자유가 누려졌다고 평가하여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 콩스탕의 평가는 개인적 자유를 고대인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되, 그것에 높은 가치가 부여된 것은 분명히 근대라는 뜻으로 할 수 있다. 고대인의 자유의 조건이 소규모 인구와 영토, 동질적인 종교를 보유한 노예소유자의 전사공화정인데 비해 근대적 자유의 조건은 대규모의 혁신과 자유계급, 종교적 다원주의와 국제적으로 개방된 상업사회이다. 근대인의 자유가 사적 독립성의 평화로운 향유를 의미한 결과, 근대정치의 초점은 사적 영역에 대한 공적영역의 부당한 간섭의 제거에 있다. ‘개인적 자유가 진정한 근대적 자유’이며 정치적 자유는 그것을 보장한다. 이때 개인적 자유는 행동, 신념(종교), 표현, 물리적 보장 그리고 재산과 산업의 경제적 자유가 해당되며, 정부가 제공하는 합법성의 울타리 안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근대적 자유가 지향하는 관용적인 사회의 전망은, 공적 삶에의 헌신을 강조하는 시민적 휴머니즘이나 고전공화정의 이상과는 양립하기 어렵다. 만일 우리가 근대사회에 고전 자치정부의 형식을 수용하려면 인간의 엄청난 적응성(malleability)을 상정해야 한다. 콩스탕이 근대의 개인을 고전적 시민으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에 회의적인 까닭은, 그것이 개인이 자율적으로 최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한 데 있다.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근거에서 칸트적인 근대적 자율의 가치를 존중한 콩스탕은 개인적 자유의 보호에 중심을 두는 근대적 가치는, 결국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도록 이끌면서 다원적인 도덕세계에서 자신의 적응영역을 형성하고 비간섭의 영역을 보장받기를 요구한다.
  콩스탕이 묘사한 근대국민국가는 첫째, 대규모 시민으로 형성되고 상호대면적인 정치는 불가능하다. 정치는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추상화된 성찰의 문제가 되었으며 개인이 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은 거의 미미하다. 둘째, 상업과 산업의 발전은 대중을 해방시켰고 유산자 시민들의 ‘개인적 독립에 대한 생생한 사랑’을 고취시켰다. 본래 전쟁은 충동적 욕구, 상업은 계산에 바탕을 두고 동일한 목적인 평안(repos)에 도달하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수단이었다. 이제는 상업국가 카르타고가 승리하게 된 시대, 이익과 사치를 추구하는 상업이 영광과 덕성의 전쟁을 대체하고 평화로운 교역과 경쟁이 더 중요해졌다. 공동체는 시민정신보다는 기업가적 정신으로 조직되고, 개인적 자유를 위해 정치적 간섭을 거부한다. 개인적 삶의 희생에 따른 급부가 컸던 고대와 달리, 근대의 시민은 평화와 안녕의 유지와 가정적 행복의 향유를 위해 개인의 독립성에 최고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무관심과 익명성을 택하고 공적영역을 감소시킨다. 고대인의 투명한 삶에 비해 근대인의 삶은 새로운 보장 곧 불명료성의 보장을 창조했다.
 
근대인의 자유와 고대인의 자유
 
  그러면 근대인의 자유는 고대인의 자유의 조건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인가? 콩스탕은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근대인의 자유도 삶의 수동적 향유만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동력이 있어야 한다. 콩스탕 역시 고대인은 더 이상 근대인의 견본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는 루소처럼 복합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왜 이런 혼란이 오게 된 것인가? 그것은 콩스탕의 논리가 이론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을 혼합해서 사용한 데 있을 것이다. 그는 초왕당파의 특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좌파인 독립파로서 근대적 대의정부야 말로 자유와 사회적 평화에 도달하는 유일한 체제라고 강조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1817년의 선거법을 폐기시키려는 왕당파를 공격하고 나섰다. 친카톨릭 군주정에서 초왕당파의 득세로 자유가 위협받고 정치로부터의 자유와 개인중심주의가 도리어 위험을 유발할 가능성을 통감하여 정치적 비참여주의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나타냈다. 강연의 결론부에서 정치적 자유는 시민의 신성한 이익을 검증하고, 정신의 확장과 사상의 고상함이 가능토록 하여 “인민의 영광과 권력을 형성하는 일종의 지적 평등을 형성한다”거나 자유의 두 유형을 결합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권고한 이유가 여기 있다.
 
콩스탕 사상의 의의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난 시민적 자유를 강조한 강연의 결론에서 능동적 참여를 촉구한 모순은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실천적 고민의 산물이다. 콩스탕에게 그 난관은 시민대중이 사적 독립성의 추구와 이익의 향유에만 매몰되고 주권을 추상화시켜 환상적인 태도로 행사하면 개인의 실질적 영향력이 상실되어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고 독재에 노출될 위험이 커지는 데 있다. ‘가정적 애정이 공익을 대체하고’ 냉혹한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운명을 고립시키는’ 지나친 사생활중심주의가 개인을 진정한 행복의 첩경일 수는 없다. ‘운명은 우리에게 행복만이 아니라 자기완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자유는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뜻밖에도 우리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명제를 다시 보게 된다. 그 배경은 어디 있는가? 역사적 경험에서 콩스탕은 과도한 정치화(열광)와 사생활중심주의(무관심)의 위험을 통찰했다. 이 경우 고대인의 자유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지기 쉬운 근대인의 자유가 지닌 한계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인의 자유로 복귀를 의미하진 않는다. 도리어 근대성에 대한 근대적 비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콩스탕은 아이제이어 벌린과 달리 소극적-근대인의 자유만 절대시하지 않고 두 가지 자유의 상호작용을 요청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두 가지 자유가 갈등하며 양립하는 양상이 이해에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콩스탕에게 근대인의 자유는 탈사회화된 인간에 대한 탐색이 아니다. 따라서 정치로부터 사회의 권리와 자유는 주목했으나 후대의 존 스투어트 밀(J.S. Mill)과 같은 ‘사회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적 행위를 정치적 영역과 초정치적 영역으로 구분한 것은 근대사회론에 중요한 기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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