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미생(未生)>에는 말 그대로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인물 군상들이 등장한다. 무역회사의 신입사원이지만, 정규직은 아닌 ‘장그래’, 누구보다 회사에 충실하지만, 자기 삶은 거의 없는 ‘오과장’, 자신의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선임들과 후임들 사이에서 업무와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김동식 대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해야 하는 갖가지 편견을 감내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하는‘안영이’ 등. 그들이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은 ‘미생’들이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하는 공간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직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 이를 아이러니라 한다면,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긴장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한때 많은 드라마에는 회사를 장악하려는 야심이,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고민이, 배신과 모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의 욕망이 서사의 긴장을 이끌었다. 주인공과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벌이느 냐에 따라 세계는 순식간에 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아무리 옷매무새가 잘 정리된 정장을 입고, 깨끗하게 잘 닦은 구두를 신고 출근해도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 대신, 자신이 주어(主語)인 세계가 아니라, 세계가 주어인 직장에서, 피동태로만 겨우 숨을 쉬고 있을 따름인 인물들의 상황 자체가 긴장을 만들어낸다.

바둑을 다른 말로 오로(烏鷺)라고도 한다. 까마귀 빛깔 같은 검은 돌과 해오라기 빛깔 같은 흰 돌을 가지고 승부를 겨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흑과 백으로 단순명쾌하게 구분된 돌을 가지고 상대방보다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하는 이 놀이를 우리는 흔히 인생의 축소판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피아(彼我)가 명확히 구분될 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긍정문과 부정문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라면 거기에는 죽음과 삶의 이분법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저들을 ‘직장인’이라는 딱지로 묶을 때, 그들은‘ 아이러니’,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다.

바둑에서 ‘미생’은 때로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생’을 살리느냐 내 버려두느냐가 바둑 전체 판도에 영향을 끼친다. 어설프게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서 승부수를 던지는 게 더 나을 때도 있고, 과감히 살려내서 실리를 취하는 게 이득일 때도 있다.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이 순식간에 바둑판 바깥으로 ‘제거’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yes)를 외쳐도 순식간에 ‘안영이’(good bye)가 될 수 있는 게 바둑이다. 아니, 직장인들이 겪는 긴장의 이유이고 공포의 근원이다.

그래서 오과장은 장그래에게 “이기는 놈이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놈이 이기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가난하지만 씩씩한 말단 여사원이, 젊고 잘 생긴 재벌 아들과 툭탁거리며 연애하는 판타지조차 상상 불가능한 시대가 지금, 여기의 드라마=현실이지 않은가.

<개그콘서트>에서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코너 <렛잇비>는 늘 “여러분 힘내요, 여러분 웃어요, 힘들고 지쳐도 웃어요”라고 노래하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사연들은 웃기면 웃길수록, 웃기게도 우리 삶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우리가 웃었던 개그의 내용이 전혀 웃을 수 없었던 우리가 겪은 현실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 저 노래가사는, 힘들고 지친 우리에게 ‘웃으라’고 말하는 그 위로는, 공허한 마침표 같은 것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위로 같지 않은 위로라도 듣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삶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대학을 졸업하고 그렇게 ‘뽀개고’ 싶던 취업이라는 관문이, 실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얼굴만 바꾼 긴장과 공포의 연속임을 드라마는, 개그 프로그램은,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도 ‘주어’로서 능동형의 문장을 만들고픈 수많은 미생들이 수동태로 살아간다. 그렇게, ‘산주검’이 되어 세계에 ‘적응’해간다. 바둑판 바깥으로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

   
 손남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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