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옵티콘 :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모양의 감옥 건축양식을 말한다. 감독자가 자신은 노출시키지 않은 채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다.

벤담이 창안하고, 조지 오웰이 소설 속의 괴물로 그려내고 푸코가 그토록 경계하였던 판옵티콘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되려 그것은 국가의 전유물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급발진하는 정보통신기술은 국가에 항시적이고 전 방위적인 편재적 감시권력을 부여했고,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무시할 것을 요구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압박은 노동자와 소비자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감시와 분석과 관리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국가감시, 작업장감시, 소비자감시라고 하는 감시사회의 세 축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시권력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시민이 아니라 신민, 근로자 혹은 소비자로 전락하여 무한정한 통제와 훈육과 조작의 대상으로만 배회할 것을 강요당한다. 감시사회의 문제가 단순히 사생활의 침해나 개인정보의 권리문제에 한정되지 않음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피동적, 비주체적인 것으로 왜곡하면서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국가, 시민을 감시하다

국가감시는 그 선봉에 선다. 최근의 카카오톡 논란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2011년 한 해 동안 통신사업자가 수사기관에 제공한 통신사실은 약 3,600만 건에 이른다.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보다 많은 전화번호들의 통신기록을 정부가 들여다본 것이다. 얼마 전 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 혐의사건은 편의점의 CCTV조차도 수사 도구로 이용됨을 잘 보여준다. 그뿐인가? 전자정부라는 명분하에 구축된 각종의 DB들은 개인의 교육 정보에서부터 건강이나 재산·금융거래 그리고 형사사법정보까지도 수집, 저장하고 있다. 거기에 전 세계 유일의 주민등록번호 라는 단일식별자는 권력자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국민의 개인정보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여기에 모든 도로와 골목과 상점들을 포함해 곳곳에 널려 있는 CCTV들과 수백만 대의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까지도 그 국가적 감시의 대열에

참여한다. 국가는 일상적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시적으로 감시하며 시민사회를 그 권력의 발끝 아래에 식민화시킨다.

실제 이 국가감시의 폐해는 그 존재근거로 제시되는 안보와 치안과 질서유지라는 순기능을 넘어선다. 국가감시는 단순히 개인 생활에 대한 감시의 수준에 멈추지 않는다(정보수집). 그것은 아파트나 학교 등에 설치된 CCTV가 내부자와 외부인을 가려내듯 감시 대상자와 비대상자를 구분하고 그 한쪽을 배제하거나 통제하는 기능을 가진다(구획과 배제). 그리고 이러한 구획과 통제를 통해 우리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훈육). 운전자들이 과속단속 카메라 앞에서 속도를 낮추는 행동을 반복하는 가운데, 왜 속도제한이 100km여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의지는 희석되어 버리고 급기야 일상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국법의 엄중함’을 스스로 내재화하게 된다. 그뿐 아니다. 국가감시의 최극단은 일종의 프로파일링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빅데이터를 수집하여 잠재적 승객이 가장 많은 지점들을 찾아 심야버스노선을 정하게 되면 이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노선의 정류장에 맞추어 자신의 생활을 조정하게 된다. 데이터처리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과 생활을 프로파일링하고 이렇게 형성되는 가상의 인간과 사회를 대상으로 국가행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국가행정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과 생활을 맞추어나간다. 결국 국가감시는 그 자체 시민들의 생활을 조정하고 구성하는 신성권력을 만들어 우리 위에서 군림하게 만든다.

이런 디스토피아에서는 국민이 더 이상 주권자가 되지 못한다. 감시당하는 시민들은 감시의 외형적 효과인 질서와 안전에 안도하며, 국가가 강요하는 신민적 규범들을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외부적인 감시와 통제를 통해 절대 권력을 형성하는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의 수준을 넘어, 인간의 사고와 행동 그 자체까지도 통제하는 <매트릭스>의 사회가 우리의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업의 감시 속에 노동자의 권리도 사라진다

 

작업장감시는 국가감시와 마찬가지로 일방향적으로 이루어진다. 피감시자인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 어떻게 감시당하는지 전혀 모른다. 혹은 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 감시체제를 구성하는 원리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노동자의 인격과 개인적 생활 그 자체도 임금노동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관리자의 통제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포괄적 지배조차도 쌍방 간의 합의에 기반을 둔 고용계약이라는 ‘사적행위’로 이해되면서 인권이나 헌법적 통제의 바깥에 자리 잡게 된다. 한마디로 작업장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프라이버시는 이 작업장감시의 틀 속에서 여지없이 물화되고 상품화되어 수탈되는 것이다.

개발독재 시절의 봉제공장에서 화장실 가는 횟수와 시간까지 통제하였던 노동자인권 침해의 사례는 여기서 비견할 바 못 된다. 정보화 기술을 이용한 작업장감시의 체제에서는 손끝에서 발끝까지 노동자의 모든 행동이 계량화되고 집적되어 생산성의 관점에서 분석된다. 그것은 노동자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실시간으로 조사되고 기록되며 평가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한 곳-주로 CEO 등의 관리자-에 집중되어 장시간에 걸쳐 인사고과자료로 활용된다. 이는 고용계약체결 시의‘ 평등함’이 노동자의 절대적 복종에 의거한 작업관계로 이행함을 의미한다. 노동 유연화 등의 추세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들은 이 체제하에서 관리자의 지시에 순응하여야 하며 자신이 하는 작업의 성격이나 질, 방법과 속도, 작업장 내에서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형성 등 모든 것들을 규제받고 또 통제되는 상황에 굴종하여야 한다. 감옥과 자본주의적 작업장은 개인 생활사를 보유하고 관리함으로써 규율적 권력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되 는 지점이 있다는 기든스의 분석은 이 점에서 타당하다.

 기업에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소비자감시

휘태커가 참여적 판옵티콘이라 명명한 소비자감시는 또 다른 모습의 감시사회를 구성한다. 이것은 쌍방향의 감시체계이다. 기업은 고객의 과거 구매경력으로부터 획득되는 정보 외에도 각종의 마일리지나 상품권 등의 혜택을 미끼로 소비자정보를 수집한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는 자발적으로 혹은 추정적 동의에 의해 기업의 감시체제에 스스로 복종하는 양상이 벌어진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의 존재목적은 구매에 참여할 소비자를 예측해내는 동시에, 위험인물이나 (소비자로서의) 자격미달자를 배제하는 데에 있다. 소비사회는 특정상품에 반응하고 구매하는 소비자만이 의미를 가진다. 소비자감시는 이에 기여한다. 누가 잠재적 소비자로서 광고와 판촉의 대상이 되며, 누가 배제되어 소비사회의 바깥으로 추방되어야 하는지를 구획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회원가입서에 적힌 주소는 그의 경제능력을 판단하는 자료이며, 변두리 지역 거주자에게는 명품광고지가 송부되지 않는다.

여기에 데이터 프로파일링 기법이 동원되면 가상의 소비자를 타깃으로 한 판촉행위도 벌어진다. 예컨대 영국의 한 백화점은 마네킹의 눈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안면 인식 기술과 결합하였다. 고객이 마네킹을 쳐다 보는 순간 그의 구매성향을 파악한 컴퓨터가 마네킹 바로 옆의 모니터를 통해 그가 살만한 상품을 광고하는 방식은 그 연장선에 있다. 그래서 ‘세수하러 갔다가 물만 먹고’ 오는 고객들이 속출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소비자주권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국가감시나 작업장감시에 더하여 권하는 대로 사고 산 것에 자신의 생활을 맞추어나가는, 피동적 삶의 모습은 이 지점에서 재현된다.

 감시는 권력이자 저항

“감시국가에서 감시사회로!” 이는 휘태커의 현실진단이다. 이제 감시의 주체는 국가에서 기업으로, 기업 내부에서 외부로 무한 확장한다. 조직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이윤 추구의 동기가 존재하는 한 감시는 우리의 삶을 전 방향에서 옥죄어온다. 그 감시-정보수집-에 우리가 동의하였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동의 자체가 사회적으로 배제되지 않으려는 마지못한 몸부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두 절대권력-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해야 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현실이다. 능동적 시민이 사라지고 절대복종의 의무만 강제되는 신민만 이 존재하며 삶의 주인이어야 할 인간이 한 갓 생산수단과 구매기계로 전락하는 미래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시사회는 시대적 대세를 차지하고 있다는 데서 우리의 불행은 시작된다. 그러기에 정작 중요한 것은 감시사회의 도래를 막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 규율과 통제, 훈육과 권력의 체제 속에 ‘감시’의 권력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항의와 저항이다. 역감시는 이런 <뉴 로맨서>(W. 깁슨 저)의 사회가 야기하는 질곡들에 대한 작은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감시카메라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대상에서 우리 스스로 그 감시자의 눈을 쳐다볼 수 있는 또 다른 감시자가 되고자 할 때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는 그나마 한 걸음을 늦출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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