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9년(1478) 4월 15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남효온이라는 성균관 유생이 올린 한 장의 상소문 때문이었다. 모두 여덟 조항으로 이루어진 상소문은 당시의 폐단과 훈구대신의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차있었다.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훈구대신들은 젊은 유생이 감히 자신에게 대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장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며 벌떼 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특히,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마지막 조항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성종은 상소의 내용을 문제 삼아 처벌한다면, 언로가 막히게 된다고 다독이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은 남효온을 ‘미친 서생’이라 헐뜯으며 현실 정치세계로의 길을 차단해 버렸다. 그 사건 이후, 남효온은 울분에 가득 찬 폭음과 글쓰기, 그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생을 마감했다. 올바른 세상을 꿈꾸던 젊은 남효온의 삶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훈구대신들은 왜 그리도 현덕왕후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건의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까? 문제의 발단은 남효온이 두 살 되던, 1455년 윤6월 1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경복궁의 하루는 화급하게 돌아갔다. 수양대군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단종을 찾아가 역모를 꾀한 금성대군을 처벌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어린 단종은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연루되었다는 인물 모두 유배 보내도록 한다. 그리고는 이런 명도 함께 내렸다. “내가 나이 어리고 일을 잘 알지 못하여 간사한 무리가 날뛰고 역모가 그치지 않으니, 대권을 수양대군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왕위를 선위하겠다는 말이었다. 수양대군은 거짓 눈물을 흘리며 받을 수 없다는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바로 경회루에서 어보를 받고,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즉위식을 거행했다. 태평관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 사신에게 즉위 사실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형식적 절차를 마친 뒤, 밤이 깊었음에도 서둘러 정인지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 많은 일들이 단 하루에 치러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참극,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던 날의 전말이다. 그리고 2년 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보내지고, 그곳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음을 당했다. 문종과 합장되어 있던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도 묘가 파헤쳐지고 신주도 종묘에서 철거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런 엄청난 참극이 휘몰아쳐갔건만, 세조와 그에 빌붙은 훈구대신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그 부당함을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성종에게 세조의 처사가 인륜에 어긋난 것임을 처음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한명회와 같은 훈구대신이 그토록 분노했던 까닭은 그런 불법을 주도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상소문을 올린 남효온은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처벌은 겨우 면했지만, 그보다 훨씬 혹독한 삶을 살다 죽어야 했다. 하지만 남효온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거나 젊은 날의 올곧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대신 정치를 통해 바로 잡을 수 없다면, 그날의 참극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의 즉위가 선위의 형식을 가장한 강압적 찬탈이었음을 <추강냉화>에 기록했고,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하려 했던 것이 역모가 아니라 충절이었음을 밝히기 위해 <육신전>을 지었다. 그의 기록은 은밀하게 전해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마침내 역사적 진실로 자리 잡아 갔다. 결국 숙종 17년(1691) 사육신이 복권되고, 숙종 24년(1694) 노산군도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단종이 폐 위된 지 무려 239년 뒤의 일이다.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 그토록 지난한 작업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하지만, 아무리 은폐하려고 해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점은 더욱 기억해야 한다. 깊숙한 구중궁궐 안에서 아무리 은밀하게 공모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그날의 사건을 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진실은 결국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밝혀지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세월호의 참극과 아픔, 그럼에도 권력을 틀어쥔 자들이 조사권과 기소권을 줄 수 없다며 그날의 진상을 은폐하려고 해도 그날의 진실은 덮어질 수 없다. 1455년 윤6월 11일의 기억, 지금 그들에게 주는 엄중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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