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교과서에도 수록된 적이 있는 김명수의 시 하급반 교과서 는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와 ‘시 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다시 알려준다. 시인은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하고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라고 쓰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문학교실을 상상하게 하는 이 시의 정경은 학생 제각각의 목소리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통일하며 획일화하고 있다. 이 서글픈 교실의 풍경은 우리의 아이들이 생각의 차이나 감정의 다름을 표현하지 못한 채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적 알레고리이다.

아이들의 다양한 사고와 감성을 계발하여야 하는 학교의 책 읽기조차도 이미 수직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시스템의 재생산 기제로 변질되고 있는 모습, 이 폭압적인 교육 체계와 구도를 시인은 아주 익숙한 풍경을 통해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의 선창과 학생의 복창이 반복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잘못된 것’의 오류를 지적할 수 없고, 또 자신의 생각 차이를 감히‘ 다르다’고 표현할 수도 없다. 평론가 유종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하급반 교과서 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전체주의적 정경과 겹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2000년대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 하급반 교과서 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마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월호’의 이미지와 중첩될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라고 말할 때 ‘아니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사소통 체계와 사회적 분위기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형성되어 있지 못하니 말이다. 실제로,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수목적인 질서의 폐해가 가장 파국적인 형태로 출몰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월호, 아니 우리의 아이들은 여전히 ‘맹골수도’의 차가운 바닷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야 할 정치권은 상호 비방과 ‘네 탓’ 공방만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유족은 상처 받고 사건의 진실은 거센 물살 속에 사라질 것만 같다. 이런 와중에 세월호 추모시집이 발간된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실천문학사,2014)는 진보적 문학운동단체인 한국작가회의 소속 시인들이 함께 묶은 공동시집이다. 하지만 이 추모시집에서 ‘시적인 것’의 본질과 서정시의 특질(문학성)을 찾는 것은 무용하며 또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집은 서정시의 본령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를 폭발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 순간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송경동)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나희덕)는 것을 잊지 않는 것뿐이다.

추모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는 분명 시인(들)의 절절한 외침이다. 하지만 이 실천적 행위가‘ 세월호’의 아픔을 완전하게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또 시인들의 릴레이단식이나 시낭송, 추모제 등이 이 사태를 견뎌내기 위한 작가적 알리바이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비판에 반대급부의 비평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 역시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시는 현실을 직접 변화시키지 못한다. 1980년대의 ‘노동시’가 그런 역할을 잠시 맡기도 했지만, 그것은 시 자체의 역능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1980년대와 같은 시의 정치성을 기대하는 것 역시 무리이다. 허나, 시가 현실 변화를 추동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분노한 시인들의 말(들)을 점화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마음의 매듭’까지 절단할 수는 없다. “기억하고, 기록하라”는 추모시집의 수많은 전언들, 그리고“ 맹골수도에 잠든 하얀 꽃들”에게 바치는 눈물의 말(詩)들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이 공동시집이‘ 공통의 목소리’가 되어, 또 진정성 있는 ‘슬픔의 메아리’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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