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화배우 김보성의 한 음료 광고가 유튜브 조회수 280만을 넘었다. 시를 쓰는 낭만마초의 이미지를 줄곧 유지하던 그가 우리 시대의 화두로 급부상한 것은 매우 이례 적이며 의미심장하다. 그가 의리를 내세우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마초로 소비되었던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음에도, 새삼 이 의리의 마초남이 대중들에 의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 한다. 이 정의에 따르자면,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의리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니 꼭 김보성 씨만의 트레이드마크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초이즘과 결합된 김보성식 의리가 주목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한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때, 한국 대중문화에서 의리는 조폭 영화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상되었다. 코미디 조폭물이건 낭만적 조폭물이건, 현실적 조폭물이건 간에 의리 있는 인물의 등장은 조폭의 전형적인 한 요소였다. 예를 들어 영화 <신세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부라더’를 외치던 정천(황정민 분)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전형적인 조폭이다. 그러나 의리 남이 의리 없는 자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영화 또한 드물었음을 상기한다면, 바야흐로 ‘의리’의 시대가 지나고‘ 정치’와‘ 이해(利害)’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 영화의 결말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시대착오적인’의리를 여러 사람들이 다시금 들먹거리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리는 우선, 소위 ‘쌈마이’들의 남성다움에 대한 추존이 아니라 되레 그 반대다. 시대착오적이고 경직된 말과 행동을 격하하는 비웃음과 냉소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리는 우리 사회에서 추구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폐기처분된 행동규준이며 그 시대착오성이 역설적인 웃음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초들의 의리는 단지 비웃음으로만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보성씨가 의리는 정의(正義)이고 동시에 사랑이라고 강변하면서 스스로 의리남으로서의 포지션을 취할 때, 우리가 희미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추구될 수 없는 인간 관계를 그가 취하고 있 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그의 ‘의리’는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의 곤궁과 불행을 모른 척하지 않는 윤리적 태도로까지 승격한다. 이해와 경쟁, 강자독식의 인간관계가 아닌 상호호혜에 기반한 그의 소박한 윤리성은 되레 가치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끼리 ‘다 해 먹는’ ‘밀실 정치’의 지긋지긋한 과정을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의리는 권력의 비합리적·반이성적·무규칙적 행태를 직관적으로 꿰뚫게 하는 손쉬운 낱말이기도 하다. 낙하산 인사, 야합, 제 식구 감싸기 등 권력의 온갖 뻔뻔한 추태는 그들끼리의 의리가 사회 전체의 불의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처럼 ‘의리’라는 키워드는 복잡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 단지 ‘소비’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그저 짝퉁인 ‘으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으리’를 ‘의리’로 ‘소유’하는 능동성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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