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지막 장면. 한강 다리 위에 트렁크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저 가방의 주인은 어디에? 그곳을 지나치는 버스 내부 시점으로 포착된 이 장면은 카메라의 객관적 거리 덕분에 더 큰 반향을 불러온다. 마침 버스 안에서 그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 승객이라도 비극의 일단을 눈치챌 만한 상황이다. 카메라가 강을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이미 한 생명은 시퍼런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 다음 하얀 포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강물이 삼킨 육신이 한차례 수면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사라진다. 다 끝난 것이다.

<한공주>를 뒤늦게 보았다. 작년 부산영화제에 소개된 후 국제영화제 서킷을 순회하며 숱한 상들을 휩쓸고 국내 개봉에서도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이 영화를 이제야 접했다. 하필이면 지금이라고 해야 할까? 참혹한 사건을 당한 한 소녀의 ‘그날 이후’를 다룬 이 영화는 2014 년 4월 16일 이후의 시간들과 자꾸만 오버랩되면서 무시무시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사건(혹은 사고)이 있었고, ‘그날 이후’ 그것이 실상 사회적 살인이었다는 걸 고통스럽게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죽음(들)은 서로를 반향한다.

<한공주>는 단언컨대 ‘힐링 시네마’가 아니다. 실은 상처를 후벼 파는 영화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긍정의 에너지로 함께 통합된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말 따위는 탄원서를 들고 희생자 소녀에게 이리떼처럼 덤벼드는 가해자 부모들에게나 도움이 될 법한 얘기다. 혹은 6.4 지방선거를 앞둔 초조해진 여당의 레퍼토리거나. 지금 우리 사회는 희망과 통합을 말할 단계에 이르지 못한, 가해자와 희생자조차 구분 못 하는 수준의 사회다. 그러니 희생자가 도리어 도망 다니고 엎드려 간신히 사과받고 온갖 망언들에 시달리며 경찰의 감찰을 당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에는 일종의 반전이 있다. ‘공주’가 물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카메라는 수면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자 허망한 물결 사이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잠영하며 스크린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움직임. 기적같이 아름답고 절박한 그 몸짓이 필자에겐 온전히 판타지로 보였다. 놀라운 것은 많은 이들이 그것을 환영이 아닌 실재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영화는“한공주! 한공주!”를 끝없이 연호하는 아이들의 외화면 목소리로 가득 채우면서 끝난다.

우리 시대의 ‘공주’들을 응원하는 이 목소리에 필자의 목소리도 더 할 수 있다면… 하지만 너무 늦었다. 희생자와 약자를 응원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곡해하거나 그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이 장면은 근래 본 최고의 엔딩으로 오랫동안 기억할 만하다. 하지만 그 응원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게 아니던가. 여기에 하나의 목소리를 보탬으로써 일말의 위안을 얻는 것은 결국 관객들이기 때문이다. 위로받을 자격이 있을까. 적어도 이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에 책임이 있는 기성세대인 필자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그 날 이후’, 우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한공주>의 참혹한 비극을 비극 그대로 직시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파괴적인 분노가 때로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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