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맞이하는 부대신문사로부터 원고청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쩜 필자의 인생의 여정과도 같은 연륜이자, 2000년 초 대학신문의 주간을 맡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창작에 대한 근원적인 갈증을 말하고 싶다. 시는 2002년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된 작업이었다. 나이 50을 넘어설 무렵 무엇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끔 했는지 궁금할 만하다. 그 만큼 일상적인 궤도를 벗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이, 즉 내면의 변화가 절실했다. 필자의 전공은 독일문학과 문학비평이다. 일반적으로 글쓰기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시->수필 또는 소설->비평”이 아니라, 그 역으로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허나 그렇지 않다. 10여 년 동안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동기는 문학강의와 비평활동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창작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교육과 연구라는 대학교수 본연의 임무로 인해, 그리고 외국문학이라는 특성으로 비롯되는 갖가지 제한들이 필자의 발목을 오랫동안 잡아 두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문학의 생산자인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만 하는가?, 가르치는 사람은 어떻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필자를 괴롭혔다. 대학에서 외국문학을 가르치고 평론활동을 한다는 입장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점에서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일탈도 생업의 언저리에서 느낀 세상 이야기이지만, 필자에게는 고향과 타향, 고국과 이국, 학문과 현실, 산과 바다, 회상과 앞날 사이에서 늘 부대끼는 삶을 통해 아름다움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시 쓰기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등단 시 몇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를 갈음하고자 한다. 필자는 갯가 출신이다. 고향을 떠난 후 많은 세월 속에서도 필자를 붙잡아 두는 기억은 바로 ‘바다’이자,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촌’의 체험이다. 어부를 소재로 <도다리 가족>에서 지난날 가난과 희망의 서정을 담아보고 싶었다. 허나 ‘봄 도다리’ 자식들의 소박한 바람인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가을광어’로 의미치환이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희망의 근원은 태생과 세대 간의 연결과 소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에서 소년의 뿌리를 그리고 다음 세대와의 이음을 따로 엮는 역설이 이어지고 있다. 달리 세월의 망각 속에 그러한 어부의 나라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지만, 밤잠 설친 도다리의 비명소리마저 들리지 않는게 아닐까.

이처럼 고향의 옛 기억과 미래의 새로운 기억은 어디까지나 지은이가 유년시절 겪었던 막연한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기억의 편린이자 체험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더구나 현실은 더욱 냉정할 뿐 과거 역시 보상하기 힘든 실체이다. <마라도의 낮 달>에서는 이러한 시적 자아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머무는 경계인이 자 이방인의 모습으로 회한과 그리 움으로 밤새 잠 못이루고 뒤척거리고 있다. 정작 시인이고 싶고 신선이고 싶은 ‘새’와‘ 섬’의 자기 이름인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위로’의 기억은 <고추잠자리의 오후>를 통해 과거와 현실의 순환고리에서 늘 맴도는 첫사랑의 미련과 풍성하기에 서러움 타는 가을 속 타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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