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엇이 자신의 시 <황무지> 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을 때, 이는 세계 대전으로 황폐해진 서구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2014년 대한민국 의 4월은 문자 그대로 ‘가장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봄 같고 꽃 같은 4월의 아이들을 차가운 바다에 빠뜨려 버린 대한민국은 그렇게 온통 죄의식 가득한 나라가 되었다.

세월호 침몰 이후로 방송의 보도 행태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 쏟아져 나온다. '오보 경쟁’하듯 쏟아내는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저널리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차분하고도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저 감정을 자극하고 사건을 눈요깃거리로 만드는 ‘찌라시’들이 범람하고 있음은 이미 수많은 사례들로 확인되는 바가 아닌가. 공중파 방송에 대한 환멸로 사설 인터넷 방송에 눈과 귀를 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은 단지 음모론에 대한 솔깃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방송들은 국민들에게 진실을 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죄의식과 절망감을 강요하는 데에 만 혈안이 되어 있다. 죄 없이 순수 한 학생들이 바다에 빠져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상황에 분노하도록 하다가 곧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절망감만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 다. 천천히 침몰하는 배를 보여주면서, 제 몸만 빠져나온 선장의 얼굴을 ‘자료화면’으로 비추면서, 그들에 게 모든 사태의 책임과 원인을 돌려 놓고 있다. 그렇게, 우리를 사로잡은 이 죄의식은 곧바로 그 원인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그런데 혹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손쉽게 희생양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모든 죄의 원인이 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단편적이고 일차적인 원인에 모든 증오심을 투여함으로써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모든 죄악(사고)의 근원을 선장과 선원들에게 돌리는 방송은 이미 그러한 태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미 세월호 관련자들은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았고 온 국민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 나 그들의 죄만을 묻는 것으로 감정을 소비하고 사건을 마무르려 한다면, 제2 · 제3의 세월호 사고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뜻도 아니고, 그들의 잘못을 구조에 치환시켜 사건의 본질을 흐리겠다는 논리도 아니다. 다만 사고가 지닌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 가깝고도 직접적인 원인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오랜 숙고가 없다면, 아이들의 무참한 죽음을 너무나 헛되게 만들 뿐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방송은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서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의 주어를 ‘정부’로 바꾸어도 좋겠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우리’로 바꾸어도 좋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닌 이 불편하고도 참혹한 감정 을 자기 동력으로 삼아, 이 사건을 잊지 않는 것이고 시스템의 발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며 죄악의 원인이라는 가정적인 대상에 쉽사리 우리를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더이 상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냉소주의 자여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분노와 절망감에 사로잡힌 낙인 찍기가 아니라, 페터 슬로터 다이크가 말했던 ‘뻔뻔함’, 그 불편한 자기 응시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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