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남훈 문학평론가

화장실에 들어가니 금연 포스터가 칸칸마다 붙어있다. 깨끗하게 정리된 잔디밭에는‘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가, 제법 널찍한 벽에는 심심찮게‘ 낙서금지’가 재미없는 낙서처럼 심드렁하게 시선을 잠깐 붙잡는다. ‘주차금지’,‘ 흡연금지’,‘ 수영금지’‘, 쓰레기투기금지’‘, 소변금지’,‘무단횡단금지’‘, 자전거통행금지’,‘애완동물출입금지’,‘ 고성방가금지’,‘ 19세 미만 출입금지’······. 세상에는 왜 이리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많은지.

별 효과도 없는‘ 금지’문구들이 너무나 많이, 자주 눈에 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모르는, 이제 막 걷고 말하기 시작하는 아이들만 사는‘ 유치원 공화국’인 듯, 온통 금지와 위협의 언어가 우리들의 일상을 둘러싼 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규율의 언어들, 일방적이고 위협적인 언어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감각되는 사회를 과연 정상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혼자 있어도 두 눈을 치켜뜨고 있는 이 미세한 감시의 언어들은 우리를 이미-항상 잠정적인 죄인으로 취급한다. 또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의 행위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명령을 그대로 따르거나 혹은 거부함으로써 안존감 혹은 죄의식을 일상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명령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아니라 명령에 대한 대타반응이 전부인 미시권력적 감시규율체계.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자유를 권력에 떠맡긴 대가로 안락을 제공받는‘ 자유로부터 도피’(에리히 프롬)하는 자가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어느 인터넷 방송에서 시작된 고유명사‘ 먹방’이, 지금은 먹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을 가리키는 보통명사화 된 것은 여간 의미심장하지 않다. TV에서 ‘먹방’ 장면을 보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가 않다. 예능프로그램들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심지어 정보를 소개하고 안내하는 교양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먹는 행위는 그저 하루 세 번 챙겨야 하는 사사로우면서도 꼭 필요한 일상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그 자체로 구경거리가 되고 관심을 끌 수 있는 대중문화의 키-아이템이 되었다. <아빠! 어디가?>에서 한 어린이가 보여준 귀엽고도 게걸스러운 탐식(貪食)이 특정 상품을 불티나게 팔리게 하고, 한때 폐지설까지 나돌았던 <해피투게더>가 <야간매점>을 통해서 시청률 반등에 성공한 것은‘ 먹방’의 유행이 지닌 파급력을 새삼 환기시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초콜릿복근, S라인 몸매라는 이상적 육체와 그것을 향한 다이어트라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절차에 포획된 우리의 일상이 어른거린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스스로의 육체를 규제해야만 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다. 먹는 행위로 말미암아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먹는 것과 같은 안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먹는 것을 맛깔스럽게 보는 것만한 게 없다.

규율에 구속되고도 규율을 원하는 인간이 죄의식을 억누르고 안락 가운데 제 몸이 놓여있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그 억눌린 힘은 사라지지 않은 채 어떤 얼굴을 하고서든 삐져나온다. 규율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불안하고도 불온한’ 행위를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상적 미시규율사회‘. 먹방’은 그렇게 TV화면 앞으로 귀환하여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른 증상으로 우리에게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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