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운이 싱그럽게 퍼지는 3월, 흙 속에서 움트는 새싹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약동하는 봄은 우리의 발길을 산으로 이끌곤 한다. 새순으로 단장한 산자락을 거쳐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리면 어느덧 정상이다. 사방이 시원스레 트인 대기로 내지른 야호 소리에 맞은편 산이 맞장구치며 잔잔한 반향이 이어진다.

이제 시선을 따라 첩첩 둘러싸인 산들을 가만히 응시해 보자. 봄 햇살 아래 놓인 산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경험적으로 가까운 산은 선명한 녹색과 깨끗한 윤곽을 뽐내지만 멀리 있는 산은 다소 탁하거나 흐려 보이고 약간의 푸른색 색조를 띤다는 걸 안다. 수종과 고도가 비슷한 산들의 모습이 거리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은 햇빛과 대기가 만나 빚어낸 전형적인 광학 효과 때문이다.

대기를 이루는 공기 분자나 먼지, 미세한 물방울들은 직진하는 빛을 산란시켜 사방으로 퍼뜨리는 성질이 있다. 가까운 산에서 출발한 빛은 진행 경로가 짧고 산란을 덜 경험하기 때문에 선명히 보이지만 먼 산을 떠난 빛은 경로가 길어서 산란이 심해지고 그만큼 희미하고 탁하게 보인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 먼 전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다. 하지만 먼 산에 덧씌워진 푸르스름한 색조는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빛은 단순히 사물에서 출발한 빛, 가령 햇빛이 산과 같은 사물에 부딪혀 반사된 빛만이 아니다. 자연에는 지구의 대기가 햇빛을 산란해서 사방으로 퍼뜨리는 소위 ‘천공광’이 풍부하게 있다. 구름이 잔뜩 낀 날, 햇빛이 지구 표면에 직접 닿지 않아도 날이 저녁처럼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햇빛이 하늘을 뒤덮은 구름 속으로 들어와 사방으로 산란되어 퍼지고 그렇게 확산된 빛이 지구 표면까지 내려오기 때문이다.

구름이 없는 맑은 날은 어떨까? 이때는 대기를 구성하는 공기 분자들이 빛을 산란시킨다. 그런데 공기 분자처럼 작은 입자가 빛을 산란하는 방식은 다소 특이하다. 이들은 백색광인 햇빛의 빨간색 쪽보다는 파란색 성분을 훨씬 더 많이 퍼뜨린다. 하늘을 가로질러 통과하는 햇빛 중 파란색 성분이 주로 산란되어 사방으로 퍼지니 우리 눈에 하늘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게다가 정상에 선 나와 먼 산 사이를 가득 채운 대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천공광을 사방으로 퍼뜨리니 먼 산에서 출발해 우리 눈에 들어오는 빛에 푸른색 색조가 더해진다.

이런 대기 광학 효과는 미술가들에 의해 원근법으로 활용되어 왔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를 떠올려 보자. 모나리자의 배경을 보면 가까운 곳의 산과 지형은 윤곽이나 색조가 뚜렷하고 불그스레한 반면 먼 산은 탁하고 흐릿하며 다소 푸른 색조로 그려져 있다. 색조와 디테일의 섬세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2차원 화폭에 그려진 작품에서도 거리감과 입체감을 생생히 느낀다. 이런 대기 원근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가 르네상스였고 다 빈치는 그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매일 보는 평범한 모습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산악의 중층적 명암과 색조는 태양과 산맥, 대기를 이루는 물질들이 협력해 빚어낸 빛의 교향악이다. 빛은 그 모든 것들을 연결하고 조율한다. 우리의 존재도 자연에 형성되는 무수히 많은 연결의 교차점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하산 길 느끼는 봄내음이 더욱 향기롭다.

  고재현 한림대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 교수
고재현 한림대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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