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감독 '나의 올드 오크'(2023)

부산대 북문에서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새 카페 헤세이티로 발길이 멈추곤 했다. 입간판을 내걸고 있던 상가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이 곳은 들르는 날이면 나른한 햇살을 쬐며 하품하는 고양이 헤세와 놀아주고, 책장에 수두룩하게 꽂혀있던 인문학 장서들을 꺼내 읽거나 지인과 담소하는 걸로 소일하던 장소였다. 인문학 공동체 활동의 거점으로 출발했다가 운영난에 부딪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살려내고자 지킴이 노릇을 자처한 분들의 뜻과 노력으로 수년을 더 버텼다. 그리고 사라졌다.

‘나의 올드 오크’(2023)를 보면서 불현듯 헤세이티의 오랜 추억을 떠올렸다. 노동자 계급의 삶을 카메라로 담는 작업에 평생을 바친 대가의 잠정적 은퇴작은 그답게 이등국민 취급받고 버려진 변방의 사람들이 처한 계급적 현실을 다루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영화는 공간에 의해 재구성되는 인간의 관계와 공동체에 대해 사유할 많은 지점을 시사한다.

탄광촌 더럼의 상황은 한국의 지역사회를 사는 시민의 입장에서 우리가 직면한 현실과 그대로 겹쳐 보인다. 기반 산업이 몰락해 지역 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인구와 자본이 빠져나간 주택과 상가는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기 일쑤인 몰락한 동네는 오로지 폐광되기 이전, 마을 공동체의 활력과 정감이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채 현재의 궁핍을 버티어가는 주민들에 의해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간신히 유지된다.

영화의 전환점은 술집 올드 오크의 주인 TJ가 오랜 시간 방치해두었던 뒷방을 새로 단장해 주민 모두를 위한 공공의 공간으로 개방하면서 찾아온다. 원래부터 단골손님이기도 한 이웃의 거점 노릇을 하던 술집이지만, 뒷방을 공동식사와 어울림의 장소로 바꾸면서부터 달갑지 않은 이방인이었던 시리아 난민들은 함께 밥을 먹는 복지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지역사회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녹아들어간다. ‘광장’이 회복되자 공동체는 다시금 생기를 띠기 시작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향해 탈주의 선을 그려나간다.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사람이 모이고, 만남과 대화의 기회가 생기기 마련이다. 고독을 품은 개인들이 외로움의 ‘밀실’에서 웅크리던 몸을 일으키고나와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나누다보면, 공간은 작게는 위안을 나누는 둥지이고, 크게는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적 담론의 장이 되기도 한다. 소비자가 되어 서비스를 구매하고 일시적인 필요를 충족하면 바로 떠나는 것 이외에는 머묾과 지속적인 관계성이 불가능한 상권의 한 구석에서, 비록 커피 맛은 썩 좋지 못했을지언정 헤세이티는 그런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던 작은 ‘광장’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분자처럼 흩어진 개인들의 ‘밀실’은 넘쳐나지만, 이들을 모이고 응집하게 할 집단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이 태부족하다. 상호작용을 위한 잉여의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가 고립된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일원이며, 나의 문제는 남의 문제와 별개로 분리되지 않는 사회전체의 병리임을 깨닫게 하고, 그러기에 변혁을 위해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본디 유럽의 근대사에서 카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던 계몽주의자들의 거점이지 않았던가? 언젠가 새로운 헤세이티가 대학가 한 구석에 다시 둥지를 틀길 바란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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