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폭염이 잠잠해지고 가을이 왔다. 매년 가을을 맞이할 때면 곱씹는 문장이 있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국내 최고령 의사로 꼽히던 한원주 원장이 세상과 작고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세 마디란다. 이 짧막한 문장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힘내’라는 말과 ‘가을이다’라는 말의 조화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달려온 올 한 해도 이제 하반기에 접어들었으니, 우릴 괴롭혔던 일들을 털어낼 수 있을 거란 용기를 준다. 동시에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하반기를 새로이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을을 앞두고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지난가을부터 시작해 겨울, 봄, 여름의 세 계절을 지나 다시 가을을 맞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다. 필자는 올해 봄 취재차 서울광장 한편에 있는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에 다녀왔다. 실제로 마주한 그들의 거처는 기성 언론에서 접한것 보다 훨씬 열악했다. 그곳에서 만난 유가족들은 일각에서 ‘분란의 대상’으로 매도한 것과 달리, 여느 부모님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학보사의 기자로서 취재를 나온 필자를 ‘자녀 대하듯’ 대해 주셨다.

그곳에서 그들이 꾸준히 요구하는 건 단 하나였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이다. 목적 역시 사고의 진실과 책임을 밝히는 것, 진실을 밝힘으로써 제대로 된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전부다. 곧 1주기를 앞둔 그들은 특별법 제정을 위해 지친 모습을 내비칠 새가 없단다. 하지만 세 번의 계절을 돌아 다시 가을이 올 때까지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정부의 언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분향소를 철거하려 하고, 시위에 경찰 기동대를 투입하는 등 시와 정부 차원에서의 규제만 더 엄격해졌을 뿐이었다.

정부와 서울시 등 권한 있는 주체의 ‘불통’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만 또다시 죽어난다. 정책 결정권자들은 육체적인 고통이 눈에 보이면 그제야 고려하는 걸까. 사계절을 천막에서 보낸 유가족들에게 겨울엔 동상, 여름엔 열병이 기본이었다. 여름엔 단식 투쟁에 돌입한 유가족 두 분의 모습을 기사로 접할 수 있었다. 필자가 지난 3월 서울 광장에 갔을 때, 다가올 여름이 진짜 고비지만 딸의 사망 진상을 밝히기 위해 어떻게든 버티겠다며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분이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수척해지신 모습이었지만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주기를 앞두고 약간의 진전은 있었다. 지난 8월 31일 특별법이 상임위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다만 그 이전에 유가족들의 ‘삼보일배 행렬’이 있었다는 점은 씁쓸하다. 지난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유가족들은 폭우와 폭염에도 개의치 않고 분향소에서 국회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전진했다. 심지어 이번 특별법 논의는 여당 의원들의 퇴장 이후 야당의 단독 처리로 이뤄지는 데 그쳤다. 무려 삼보일배의 결과로 이제 겨우 제정의 문턱을 넘었을 뿐인 셈이다.

정부는 기본적인 알권리와 시급한 안전 대책 마련을 위해 육체의 한계까지 불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각에선 '이란격석(以卵擊石)'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필자는 그들의 투쟁을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의 마음으로 응원하며 학보사의 일원으로서, 부산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노력을 알릴 수 있도록 힘쓰겠다.

              윤다교 부대신문 편집국장
              윤다교 부대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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