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앞서서 새로운 글을 보도록 해주는 창작품에 대한 심사과정은 즐겁다. 아무리 설익은 원고를 독해하느라 힘겨워하면서도 심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서툴고 치기어린 글 속에 청춘들의 아픔과 고뇌, 갈등과 열정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엿보는 것은 강의나 연구와는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그래서 가을날 이맘때 맞는 뮤즈의 초대는 늘 고맙다. 

올해 부대문학상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35편이었다. 예년보다 조금 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무엇보다 시 창작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았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소 먹먹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창작수준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응모작들에 보이는 청춘들의 상처 때문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물론 둘은 서로 엇걸려있고, 이는 또 가혹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교학(敎學)하는 심사자들의 책임도 있기에 누구를 탓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저 마음 아플 뿐이다.

응모작들은 가족간의 사랑이든, 연인간의 사랑이든,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든, 대부분 ‘사랑’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을 읽어내는 ‘눈’의 예리함과 생각의 깊음이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응모작들은 철저하리만치 개인적 지평에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 당연히 당대 역사와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는 물론이요, 사랑이 파괴되고,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에 대한 도저한 천착은 없었다. 흡사 유행가 가사와 같은 농조(弄調)는 많은 우려까지 불러일으켰다. 시를 왜 짓는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그 성찰에 바탕한 시적 함축, 비유와 상징에 대한 학습이 절실히 요구된다. 

응모작 가운데 <누가 셔츠의 목을 매게 했나>를 가작으로 선정한다. 이 시는 ‘셔츠’로 상징되는 생명이 넥타이와 ‘빨래집게’ 등에 의해 억눌린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자신이 스스로 생명을 옥죄고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반복적인 일상에 깃든 생사(生死)의 긴장을 모더니즘적 은유로 포착하는 데서 시적 성취의 가능성이 보였다. 함께 물망에 올랐던 <횟집 수족관 앞에서>는 수족관 유리를 경계로 안과 밖이 생사로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을 포착했으나 비유가 천근하다는 이유로, <북극성> <고독> 등은 성실하게 써 내린 글이 산문을 토막내 단락을 구분한 데서 더 나아가지 않았음에 아쉬움을 남겼다. 

나만의 정취를 담아내되 지나친 감상(感傷)에 흐르지 않고, 목울대까지 치미는 말을 꾹꾹 내려 눌러 단말마로 터트리는 함축의 힘을 재차 강조하며, 모든 응모자 및 시를 공부하는 이들의 좋은 시적 성취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오늘도 참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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