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신문이 창간하고 1년 뒤인 1955년, 우리학교 상학과(지금의 경영학과)에 입학한 한 청년이 있다. 졸업 후 재무부 전매청 서기관 등으로 오랫동안 공직에 몸을 담근 그 청년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버렸다. 그리고 지난 10월 14일 팔순을 맞이한 그 청년이 50여 년만에 모교를 찾는다. 바로 김성득(상학 55, 졸업) 씨의 이야기다. 그는 팔순을 기념해 떠난 여행의 첫 행선지로 부산과 모교를 택해 부인과 맏딸과 함께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재학 당시 상과대학 학생단체인 상학회 연구부장으로 <상학보> 6권 1호 편집책임자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책이나 다른 읽을거리가 많지 않은 시절이라 학생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편집국에 방문한 그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니 사랑하는 후배들이 근학과 연구에 최선을 다해 훌륭한 인물이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한 편의 글을 전했다. <인생의 목표>라는 제목의 글이다. 아래는 전문이다.

인생의 목표

석가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같은 성현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異姓)을 가진 존엄한 존재다.사람은 항상 이루어야 할 이상(理想)과 가치(價値)를 추구하며 산다. 이 이상적 가치를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은 1)창조적, 2)경험적 및 3)태도적 가치로 나누었다. 첫째 창조적 가치는 어떤 창의적 일을 하거나 무읏을 창조함으로써, 두 번째 경험적 가치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경험하거나 훌륭한 사람을 만남으로써, 세 번째 태도적 가치는 불가피한 시련에 대해 가치 있는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미래에 기대되는 희망이 있으면 현재의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낼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짐으로써 자기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능력은 한 개인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곤경을 인간 승리로 만든다.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의학과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이며 유태인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 갇혔다. 긔의 부모, 형제와 부인은 수용소에서 죽거나 가스실로 보내졌다. 그 또한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르는 비참한 상황에서 그는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성적 관점에서 자율적으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반응하는 사람에게 그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즉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 자유에는 천부의 상상력과 양심,자아의식 그리고 독립의지가 있다. 그는 출감 후 또한 인생의 목표는 쾌락의 추구에 있다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주장을 거부하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따라서 그는 운명론을 배격하고 자기 주도적(主導的) 삶을 주장했다. ’오늘의 나는 어제 내가 한 선택의 결과이다‘. 나의 선택은 자신의 의사결정에 의한 것이지 결코 주변 여건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 의지를 역설하면서 정신건강을 위한 예방·치료와 강의·저술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어 인류를 위해 봉사했다. 그의 저술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등이 있다.

삶의 의미란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다. 삶의 의미를 찾고 채우는 일은 인생의 본질이고 목적이다. 인생이란, 세상으로부터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올바른 해답을 찾고, 나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책임을 떠맡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한 인생의 전 과정을 놓고 바라볼 때 젊을 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가? 그 답은 긴 말할 것 없이 자기의 삶의 의미를 찾아 성취하는 일을 준비하는 데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다. 그래야만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기회가 오면 그것을 잡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좀 여유가 있을 수 있고 보람차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노력한 대로 즉 ‘뿌린 대로 거둔다’.

우리가 사는 현대의 풍족한 사회는 대중매체들의 자극이 흘러넘치는데 이 난장판 속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책임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명백히 구분하고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인류 문명의 발전은 삶의 패러다임(Paradigm)을 변화시켜 종래 의지하며 살아온 유전자의 본능과 가치의 전통을 거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동물과는 달리 오늘날 인간의 본능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또한 오래 동안 농업사회를 지탱해 왔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관습도 정보화 이후의 복잡 다단한 사회를 지배하는 전통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인간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최소한의 긴장마저 풀려 멍하니 종종 자신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를 때가 많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는 삶의 의미 상실과 권태에 빠진 젊은이가 많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육은 지식의 전달 뿐만 아니라 삶의 어느 상황에나 필요한 과업을 알아볼 수 있는 지성과 양심을 키워주어야 한다. 양심이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도를 잃지 않고 삶의 목표를 세워 의미로 충만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나 자신을 물리와 생물이라는 경험 영역과 자유로운 인간의 기능인 지성적 영역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 수 있는 두 가지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가 감각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그는 타율적 자연의 법칙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둘째로, 그가 지성적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연법칙과는 독립되어 경험이 아닌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법칙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 영역과 지성적 영역, 두 영역에 동시에 발을 딛고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 사물이 존재하는 현실과 존재해야 하는 방식 사이에 틈이 있다. 우리가 순수한 이성적 존재라서,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변함없이 우리ㅡ 의지의 자율과 일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성적 세계에서만 살지는 않는다. 내가 나를 자연적 존재로 바라보면 나의 태도돠 행동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감성의 지배를 받는다. 감성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 이에 반해 내가 나를 이성(지성)적 존재로 바라보면 나는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 이성은 스스로 무사·안일과 지나친 쾌락을 자제하고 의미 있는 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노력과 고통을 기꺼이 선택한다. 이성은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지혜와 함께 개발된다. 칸트는 지성적 관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나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 세계의 여러 원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자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지성적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의지의 자율을 행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의 의지에 따라 삶의 의미 있고 자기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 정성을 다 바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리요. 정신이 한번 제대로 들면 무슨 일이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원효(元曉)는 인생이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았던가? 내 인생은 내 의지에 달려 있다.이 경구처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나의 뇌는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협조하며 움직인다는 것은 뇌 과학의 이론이다. 진리를 찾아 정성을 다할 때 우리의 뇌는 내가 원하는 문제의 해답을 어느 순간 문득 또는 꿈속에서 알려 준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자기를 인도하는 영감을 준다. 뇌에는 관성이 붙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고 긍정적으로 확신하고 계속 노력하는 것은 곧 강력한 자기 암시가 되고 자기에게 최면술을 거는 결과가 된다.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의 잠재의식은 감성이고 그 감성은 현실(現實)과 환상(幻想)을 구별하지 못 한다. 따라서 최면술이 통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정력, 돈을 다 바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노력하여 나의 잠재력을 필요한 능력으로 개발하여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두뇌의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력은 저절로는 활용되지 아니하는 무진장한 생각의 보고 측두엽의 잠재의식을 자극하여 활성화시킴으로써 전두엽의 의식 즉 앎의 영역을 확대·심화하며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하낟. 그래서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곤경을 인간승리로 만든다. 성경에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4)’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노력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고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기도로 결의를 다지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좋은 결과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 모든 일은 마음에서 나와 정성으로 이루어진다. 최선을 다하고 난 뒤에 천명을 기다려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그러므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소원성취(所願成就) 이룩된다. 이것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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